[기고] ‘젊으면 갑, 늙으면 을’

포스코 라면상무, 남양 욕쟁이 영업사원, 호텔 빵사장 사건까지 갑을관계로 촉발된 화두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아시아나추락사고 이후 영문서류 제출건 등으로 국가 간의 갑을관계까지 거론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갑 아니면 을이다. 갑을관계는 보통 먹이사슬로 이어진 권력관계지만 성별, 나이, 재산 등 수많은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갑도 되고 을도 된다.

사랑하는 남녀에게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을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이 갑이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모든 자식은 갑이다. 돈이 아무리 많은 부모도 자식 앞에서는 을이다. 직장에서는 흔히 사장과 직원이 갑과 을의 대표적인 관계다. 고용했으니 퇴사시킬 수 있는 권리도 모두 가진 사장이 회사에서는 항상 갑이다. 언제든 퇴출될 수 있는 직원은 무조건 을이다. 남양유업 사태를 불러와 갑으로서 욕설을 행사한 영업사원도 회사에서는 언제든 퇴출 가능한 을이다. 호텔매니저에게 갑으로서 폭력을 행사한 제과회사 사장은 빵을 납품하는 코레일관광개발 앞에서는 확실한 을이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갑을관계는 당장 내가 주인공이다. 텔레마케팅 직원의 전화를 받는 모든 사람은 갑이다. 전화를 걸어 상품을 소개하는 텔레마케터는 항상 을이다. 그런데 갑과 을의 조화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전화한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예의를 갖추고 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슈퍼마켓, 식당, 카페, 옷가게, 백화점 등 소비의 주체인 나는 소비시장에서는 언제나 갑이다. 갑의 위치에 있을 때 을을 생각하며 겸손하게 행동했었는지 반성해 본다면 지금 일어나는 갑을관계 폐단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노래 중에 ‘겸손은 힘들어’라는 곡이 있다. 겸손이 미덕이라고 강요하는 것도 겸손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갑을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권위주의가 난무하는 한국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슈퍼갑인 대기업에 종속된 중소기업은 모두 을이다. 슈퍼갑인 대기업도 검찰청에 가면 을이다. 온라인으로 사업을 하는 모든 업체는 절대갑으로 군림하는 네이버, 다음같은 소위 최고 포탈업체들 앞에서는 을이다. 포탈에 이름이 오르지 못하면 존재자체가 사라져버리니 포탈의 부당한 처사나 강매에 동등하게 대응할 수 없다. 자칫하다 밉보이면 생사가 흔들린다. 울며겨자먹기는 을에겐 피할 수 없는 생존전략이다. 이러한 갑을관계의 생태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종속관계로 규정된 절대강자 갑의 횡포에 의해 절대약자인 을이 피흘리며 고통스러워해도 이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는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불공정거래 금지를 위한 경제민주화를 통한 방향 제시로 갑을관계의 불이익을 막으려는 정부의 움직임이 있긴 하나 음성적으로 자행되는 갑의 횡포를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상생을 위한 갑을관계, 상호보완이 되는 인격적인 갑을관계를 추구하자는 자성이 필요하다. 포털이든 제조업체든 절대강자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 갑도 얼마든지 을이 될 수 있음을 항상 직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도 갑을 관계가 있다. 젊은 사람은 통상 갑이고 나이 먹은 사람은 을이다. 나이가 적을수록 갑이고 나이가 많음을 넘어서 늙으면 확실한 을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한국사회의 서글픈 단면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10대 소년과 60대 할아버지가 친구가 되어 평등하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한국에서는 쌍둥이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할 정도로 나이에 관해서는 젊을수록 유리하다. 그러나 지금 젊다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늙을 것이니 갑은 머지않아 을이 된다. 한 중소기업의 사장님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GAP의류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옷이라도 젊게 입고 갑이 되고자 해서다. 세대차이로 갑을관계가 구분되는 것은 슬픈 현실이지만 갑을관계가 소통과 보완의 관계로 업그레이드된다면 사회비용 감소는 물론 국가의 경쟁력도 커질 것이다.

중학생이던 어린 시절부터 창업을 꿈꾸던 필자는 20대에 사장이 되었다. IT업계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린나이에 성공한다는 것은 수많은 손실부담을 안고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젊기에 짧은 연륜에서 비롯되는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십 수 년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연장자들로부터 들은 조언들 하나하나가 사업의 기반이 되었고 생명연장의 등불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우리 회사에는 연장자들이 많다. 연장자들은 IT의 빠른 진화에는 다소 둔한편이지만 정확한 판단력과 방향제시에는 경험이 필수적이며, 지혜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필자는 수도 없이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빛나는 예지에 감탄하곤 했다. 젊어서 좋은 점이 저돌적인 추진력 하나라면 나이를 먹어서 좋은 점은 기다림, 인내, 지혜, 여유 등 득이 되는 게 참 많다. 왜 우리나라는 나이먹음을 슬퍼하고 심지어 부끄러워하기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연조(年祚)를 쌓아나가는데서 오는 넉넉함을 아직 어려서 다 알 수는 없지만 사업을 하면서 느낀 점은 풍부한 경험에 바탕을 둔 판단력과 선견지명에 젊은 열정이 어우러지면 최고의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사회가 젊음과 연륜을 잘 어우러져 갑을관계가 아닌 상호보완관계, 상생하며 윈윈하는 수평관계로서 배려하는 단계로 진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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