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약체질 한국 금융, 온갖 無원칙 규제가 원인"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을 때 선진국 금융회사들이 주춤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한국 금융사들이 메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5년이 흐른 현재 한국 금융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외국 금융사들에 안방만 계속 내주고 있다. 국내 기업 간 M&A(인수·합병) 주선은 물론 국내 대기업의 해외 자금마저 외국 금융사들이 독식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한국 금융업에 미래는 있는 것일까. 대안을 찾기 위해 좌담회를 마련했다. 김기환 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데이비드 전 KDB자산운용 공동대표, 이은형 하나금융지주 글로벌 담당 부사장이 참여했다.

―한국의 금융업은 왜 약할까.

김기환 "규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규제가 많은 것도 문제이지만 규제가 투명하지 않은 게 더 문제이다. 대부분의 규제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다. 규제의 집행에도 문제가 많다. 그나마 차별 없이 적용돼야 하는데 중구난방이다. 뭐가 실질적으로 금지되는 일인지 일일이 판별하기가 어렵다. 최근 HSBC가 한국에서 소매 금융을 철수시킨다는 결정을 했는데, 한국이 금융을 하기에 생태계나 풍토 이런 측면이 나쁘니까 나가는 것이다."

유상호 "지배 구조도 문제이다. 우리나라 금융사 CEO들의 임기를 보면 보통 3년, 길어야 5년이다. 그러니 단기 실적에 연연하게 된다. 그나마 우리나라 금융업에서 성공 모델을 보면 CEO가 오랜 기간 근무한 곳들이다."

김기환 "맞다. 외국의 성공 사례를 보더라도 어김없이 유명한 CEO의 이름이 나온다. 이런 성공 사례는 CEO 임기가 12년, 15년씩 길다. 그런데 우리 CEO들의 임기는 그것의 3분의 1,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유상호 "경쟁 수준이 낮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 금융시장은 규모가 무척 커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기업 집단 소속의 금융사들이 계열사 물량을 다 가져가고 나면 나머지를 갖고 금융사들이 경쟁하는 구도이다."

―문제점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전 "금융 산업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서울을 금융 허브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허브가 아닌 변두리일지라도 얼마든지 세계 곳곳에 투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그게 진정한 세계화이다. 해외 진출을 강조하면서 뉴욕·홍콩 이런 곳에 오피스를 만드는 게 능사가 아니다."

김기환 "정부 주도의 분위기가 계속되면 금융사들은 정부 눈치를 계속 보게 된다. '어떤 부분이 경쟁력이 있으니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과거 60년대 경제 발전 모델에서 오는 사상이고 집단주의적 사고이다. 진정한 시장경제는 기업가들이 알아서 결정하는 구조이다. 정부가 지원해서 스티브 잡스가 나왔나. 개인이 도전해서 나온 것이다. 그게 될 수 있도록 규제 부담만 줄여주면 된다."

이은형 "결국 사람이다. 금융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제조업과 달리 사람을 빼면 할 수 없는 게 금융이다. 좋은 사람을 키워내는 데 더 투자해야 한다. 해외에선 현지화만이 살 길이다. 하나은행 중국 법인은 고객의 70% 이상이 현지인이라 성공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한국 금융에 희망이 있을까.

유상호 "우리는 외국계에 비해 한참 늦게 출발했다. 단기간에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다. 외국계들은 수백년이 걸려 현재의 경쟁력을 쌓아 왔다. 우리는 역사가 일천하다. 한 발자국씩 천천히 나가면 성공할 수 있다."

이은형 "맞다. 우리는 시작이 늦었을 뿐이다. 해외 진출의 패러다임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좀 더 긴 호흡을 가지고 보면 된다."

데이비드 전 "10년 내에 세계 금융에 한 번 더 파란이 올 것이다. 준비만 잘돼 있으면 한국도 글로벌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챔피언·넘버원을 좋아하는 나라라 너무 성급한데, 그럴 필요 없다. 금융에서의 성공은 외국에서 현지 돈을 받아 그곳에서 돈을 버는 것인데, 이런 데서 성공하는 회사가 나올 것이다."

김기환 "그런 측면에서 금융 산업 전체를 볼 필요가 있다. '한국계가 못하니 아쉽다'는 식의 접근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젠 올림픽에서도 반드시 원래 한국 사람이어야만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시대가 지났다. 금융 산업 전체 발전을 위해서라면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