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7.31 09:43

MINE

아끼는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취향과 안목은 물론, 어떤 가치에 열중하는 사람인지까지도. 여기, 고이 간직한 애장품을 통해 자신을 살뜰히 드러낸 네 남자가 있다.


윤광준 | 사진가의 만년필

<소리의 황홀>, <윤광준의 생활명품산책>, <잘 찍은 사진 한 장> 등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펴내며 글 쓰는 사진가로 유명한 윤광준 작가. 작업실 가득 쌓인 갖가지 애장품 가운데 윤 작가가 꼽은 물건은 다름 아닌 만년필이다. 그의 만년필은 독일의 파버카스텔(faber-castell) 제품. 1761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창립 252주년을 맞은 파버카스텔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회사로 유명하다.

윤 작가는 이런 파버카스텔을 지난 30년간 추적(!)해왔다고 고백한다. 7년 전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파버카스텔 공장을 방문한 일도 그 일환이다. “파버카스텔 물건이 좋아 무작정 공장으로 갔고, 그곳 사람들을 만난 후 이 물건을 더 깊이 좋아하게 됐다”고 윤 작가는 말한다.

윤광준 사진가
그가 숲 속 고성(古城) 같은 공장에서 만난 이는 여든이 가까운 파버카스텔 회장. “필기구 하나로 독일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회장은 나와의 면담 내내 연필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시종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자신들이 만든 물건에 대한 확신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아울러 회장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만든 필기구를 ‘물건’이란 단어로 칭하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창조의 도구’를 만든다고. 창조적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상상의 도구라고. 그러므로 자신들은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가치를 판다고 했다.”

회장뿐 아니라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작업자 역시 같은 말을 하는 걸 보고 윤 작가는 파버카스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심이라는 걸 가슴으로 느꼈다고 한다. 자발적 마니아가 될 수밖에 없었단 얘기다.

“이 만년필에서 그 사람들의 정신을 떠올린다. 그들의 생각과 마인드가 내게 고스란히 옮겨오는 듯한 주술적 효과를 느낀다. 결국 어떤 물건이든,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닌 본질이다. 형태는 복제할 수 있지만 정신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다.”

윤 작가는 만년필과 볼펜, 연필을 포함해 파버카스텔 제품을 총 8점 소유하고 있다. 그중 특히 그를 열광케 하는 것은 ‘인튜이션 플라티노 우드’ 시리즈. 견고한 나무 소재의 배럴이 트럼펫 모양으로 형상화된 것이 특징이다. 그가 소유한 것은 7년 전 구매한 갈색 퍼남부코 우드 모델.

나무가 지닌 따뜻한 감촉을 좋아한다는 윤 작가는 “쓰면 쓸수록 체취가 배어내 것이라는 느낌이 강해진다. 만지고 있기만 해도 좋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한다. “이 만년필로 무슨 일을 하면 결과가 좋은 것 같다. 계약을 할 때도 주로 이것으로 사인을 한다(웃음).” 소중한 물건이기에 아껴둘 것이 아니라 더 자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다.

“사람은 결국 꿈을 위해 돈을 쓴다. 꿈이라는 건 추상적 가치다. 나의 만년필처럼 실용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나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윤광준 작가, 그는 누가 뭐래도 ‘꿈꾸는’ 남자다.


서부석 | 쌤소나이트코리아 대표의 미술품

“나는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딱히 돈 욕심도 없다. 물건이나 돈은 그저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일상의 어떤 아이디어를 주제로 잡아 사업으로 연결하는 것. 그런 게 나는 재미있다.” 지난 2005년부터 쌤소나이트코리아를 이끌고 있는 서부석 대표.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더욱이 일 외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서 대표는 애장품으로 특별한 미술품 한 점을 꼽았다. 쌤소나이트코리아 회의실에 걸린 이용백 작가의 2005년 작 ‘엔젤 솔저(angel-soldier)’가 바로 그것.

서부석 쌤소나이트코리아 대표
쌤소나이트코리아는 지난해 이 작가와 협업한 제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때 쌤소나이트 여행가방을 장식한 것이 바로 ‘엔젤 솔저’다.

“몇 년 전 전시장에 갔다가 작은 부스에서 화가 한 분이 빨간 여행가방에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걸 봤다. 작품이 너무 예뻤다. 그 순간 ‘아, 이런 것을 비즈니스에 적용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서 대표는 천편일률적인 여행가방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공항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면 모두 비슷비슷한 여행가방들뿐이다. 짐을 찾는 20~30분 동안 넋놓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색다른 재미를 느끼면 좋지 않을까, 늘 생각했다.” 그로부터 쌤소나이트코리아와 미술가의 협업이 시작됐다. 이용백 작가와의 협업은 2011년 사진가 배병우 작가와의 작업에 이어 두 번째.

‘엔젤 솔저’는 조화(造花)로 가득 찬 풍경과 그 속에 몸 전체를 꽃으로 위장하고 총을 든 채 서 있는 군인의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오로지 서 대표의 결정이었다. 직원들이 ‘예쁘긴 한데, 가방이 잘 팔릴까요?’라며 우려를 표할 때도 “‘평화’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그.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고 그것이 또 서 대표에게 힘이 됐다. “일상을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것이 나는 즐겁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여러 사업을 진행해왔다. 사우나에서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뛰쳐나간 적도 여러 번이다(웃음).”

미술가와 협업을 시작한 이후 서 대표 개인의 삶도 조금은 변했다. 그림과 예술에 서서히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전시를 많이 보러 다닌다. 내 영향 때문인지 고 2인 딸아이는 지금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딸아이와 함께 전시회에 가는 일이 많다.”

그런 그는 디자인 분야에도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다. 디자인이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서 대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각국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디자인 밸런스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박성준 | 빌라델꼬레아 이사의 안경

“나는 무엇이든 수시로 들고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 가지를 하면 잘 바꾸지 못하는 성격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다니던 이발소를 지금까지 다닐 정도다.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면이 있다. 이런 내 성향과 빈티지는 아주 잘 맞다.” 빈티지 찬양론자임을 자처하는 박성준 이사의 물건은 안경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안경을 착용하면서부터 늘 관심을 두었다는 그는 현재 30점의 안경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 실제 착용하는 것은 4점. 가장 아끼는 것은 2006년 구입한 레트로스펙스(RetroSpecs) 제품이다. 레트로스펙스는 1870~1970년대 만들어진 안경 프레임을 취급하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박성준 빌라델꼬레아 이사
ⓒ 김승완(C.영상미디어)
박 이사의 애장품은 1930년대 12K 골드 필드로 제작한 아이템. 프레임 전체에 세공이 돼 있어 얼마나 정성이 깃들었는지 한눈에 짐작 가능하다. “지금은 손으로 안경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을뿐더러 금으로 안경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전 세계 5명 정도밖에 없다”고 박 이사는 귀띔한다.

포멀한 느낌을 주는 이 안경을 박 이사는 격식을 갖추되 너무 과하지 않은 느낌을 주고자 할 때 착용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캐주얼한 복장을 하기 민망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과한 격식은 부담스럽다. 그럴 때 적격인 아이템이 바로 이 안경이다.” 물론 오래 아껴온 물건이 으레 그렇듯 중요한 자리에도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는 자연스럽게 함께 하게 된다”는 박 이사.

그가 빈티지 안경에 매료된 것은 단지 모양이나 색깔 같은 표면적인 요건들 때문은 아니다. “빈티지는 오랜 세월이 사물 자체에 묻어 있다. 각각의 아이템에서 그 시대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1930~40년대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현재의 나는 그 시대와 교감할 수 있다. 바로 이 빈티지 물건을 통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런 박 이사의 생활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어를 ‘빈티지’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안경뿐 아니라 가구, 시계, 자전거 등 빈티지 아이템을 고루 아끼는 그는 심지어 결혼할 당시 반지나 목걸이 대신 아내가 태어난 해 만든 가구와 시계를 선물했을 정도다. “빈티지의 공통점은 충실히 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생각, 꼼수 같은 게 없다. 12K 골드 필드 안경 하나를 만들기 위해 열 가지 재료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 열 가지 재료를 꼼수 쓰지 않고 다 넣는 게 빈티지다. 요새는 아홉 가지만 넣는다. 그렇게 해도 티가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한 가지가 빈티지가 영속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박성준 이사는 자신의 취향을 사업으로 연결한 운 좋은 케이스다. 비스포크 전문매장 빌라델꼬레아를 비롯해 빈티지 가구 쇼룸 모벨랩, 그리고 레트로스펙스 매장까지. “2010년 지인과 함께 빌라델꼬레아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레트로스펙스 매장도 문을 열었다. 빌라델꼬레아가 잘 꾸려가야 할 살림이라면 레트로스펙트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가진 문화적 자산을 훗날 아들에게 물려줄 꿈을 갖고 있다. 제대로 뭔가를 만들어 그것을 후세에까지 물려주겠다는 신념을 품었던 1930년대 장인들처럼 말이다.


윤병천 | 뉴라이트전자 회장의 모터사이클

윤병천 회장은 소문난 모터사이클 라이더다. “40년간 모터사이클을 탔다. 온·오프로드 가리지 않는다. 일반 공도에서만 20만㎞를 탔다. 지금도 한 달에 서너 번은 그룹 투어에 나선다.” 더욱이 그는 스피드광이다. 자유 투어 시에는 220~230㎞까지 속도를 높이기도 한다. 일흔둘의 나이가 무색하기 그지없다. “‘스피드에 빠지면 마약을 끊게 된다’는 말이 있다. 스피드라는 게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윤 회장. “스피드를 즐기다 보면 젊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사고? “크게 다친 적은 한 번도 없다. 복장을 완벽히 갖추고 탔기 때문에 안전했다”는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2시간씩 운동을 하는 열혈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윤병천 뉴라이트전자 회장
윤병천 회장의 애장품은 역시 모터사이클. 이탈리아의 레이싱 전문 모터사이클 제조사 MV 아구스타(MV Agusta)의 ‘F4CC’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카본과 티타늄으로 제작돼 중량이 187㎏에 불과한 F4CC의 최고 속도는 315㎞. 더욱이 이는 MV 아구스타의 수장이었던 클라우디오 카스틸리오니를 기리기 위해 전 세계를 통틀어 100대만 수제작으로 만든 한정모델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아이템이다. 그 100대 중 36번째를 바로 윤 회장이 소유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F4CC 오너인 셈이다. “출시 소식을 듣고 1년여를 기다렸다. 그러다 4년 전쯤 구매했는데, 1년에 한 차례 정도 탄다. 경주장 트랙을 두어 바퀴 돌고는 아까워서 더는 못 탄다(웃음). ”

총 10대의 모터사이클을 소유하고 있다는 윤 회장은 F4CC는 아껴두고, 대신 평소에는 ‘브루탈레1090’을 주로 탄다. 이 역시 MV 아구스타를 대표하는 스타급 모델 중 하나다. “MV 아구스타를 타면 얼음판에 옥구슬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만큼 경쾌하고 날렵하다. 텁텁한 느낌이 전혀 없다. 그중 F4CC는 가히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F4CC에 흠뻑 빠진 윤 회장은 기어이 “보기만 해도 좋다. 안고 자도 모자랄 정도”라는 찬사를 덧붙이기에 이른다.

충청도 고향에서 상경한 열아홉 나이에 조명업계에 뛰어든 윤 회장. 현재 45년의 역사를 지닌 조명 판매 및 설계 기업 뉴라이트전자를 이끌고 있는 그는 4년 전 장남인 윤수녕 대표와 함께 한국 MV 아구스타 공식 총판인 모토쿼드의 문을 열었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스피드를 좋아하니까.

MV 아구스타, 허스크바나에 이어 지난 2011년부터 영국 스포츠카 로터스의 국내 판매를 시작한 것 역시 같은 이유다. “최고로 빠른 ‘두 발짜리’를 들여놓다 보니 자연히 ‘네 발짜리’도 들여놓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모토쿼드를 통해 자신과 같은 스피드 마니아들에게 아낌없이 서비스하고 싶다는 윤 회장.

현재 윤 회장이 아껴 마지않는 F4CC는 모토쿼드 2층 매장에 고이 전시돼 있다. 모터사이클을 사랑하고, 스피드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이곳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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