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만큼 놀아봤다… '파격'이 태어났다

패션 디자이너 정욱준(46)은 먹 묻힌 붓으로 휙휙 난을 치듯 한 벌의 트렌치코트를 완성하는 디자이너다. 자유롭고 담대한 디자인. 경계를 넘나들며 상식을 깨는 파격. 하지만 정작 정욱준은 "내게 트렌치코트는 달콤한 과자 향기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전위적인 답이 나올 줄 알았건만 뜻밖이었다.

◇아버지의 옷, 어른의 옷

아버지는 퇴근길마다 '산도'니 '초코파이' 같은 과자를 한 아름씩 사오곤 했다. 꼬마 정욱준이 저녁 무렵 대문 앞에서 마주친 것은 "욱준아, 아빠 왔다"라는 아버지 목소리, 그 품에서 나던 과자 냄새, 그리고 그 빳빳하고도 묵직했던 카키색 트렌치코트의 깃과 자락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진짜 남자라면 트렌치코트를 입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게."

그래서일까. 2007년 6월 처음 참가한 파리 컬렉션에서 정욱준은 트렌치코트 30여벌만으로 무대를 채웠다. 쇼가 끝난 직후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주목받을 만한 신인 6명' 중 한 명으로 정욱준을 꼽았다. 그 후 이어진 12번의 파리 컬렉션. 정욱준은 이제 어엿한 '파리 의상 조합' 정회원이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로선 처음으로 프랑스 유명 편집숍 '레클레어'에 옷을 건 것을 시작으로, 이젠 미국 뉴욕 명품 백화점 '바니스'와 영국 유명 패션 매장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도 그의 트렌치코트가 버젓이 걸린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멋에 민감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친구 넷이 모여 참고서 산다고 받은 용돈으로 몰래 옷을 사입고 다녔다. 발목까지 길게 끌리는 코트나 헐렁한 배기 바지, 큼직한 오버 사이즈 점퍼, 종아리를 꽉 조이는 '당코바지'까지…. 정욱준은 "옷으로 할 수 있는 실험은 그때 다 해봤다. 지금 내 컬렉션이 과감하고 색다르다면, 그건 고등학교 때 놀 만큼 놀았던 덕일 거다"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때도 트렌치코트는 입어보질 못했다. 비싸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함부로 입을 순 없는 옷' 같았기 때문이다. 19세 미대에 입학하자 어머니는 선물로 트렌치코트를 사주셨다.

정욱준은 "그때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됐음을 실감했다"고 했다. "몸에 걸치는 순간 깨달았다. 이 옷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는 걸. 허리끈을 푸느냐 묶느냐, 헐렁하게 입거나 꼭 맞게 입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이 된다는 걸. 어떤 액세서리도 필요치 않다는 걸. 트렌치코트는 그야말로 '성숙의 옷'이라는걸."

◇'완벽한 옷'을 해체하다

대학교 3학년 1학기 때 군대에 갔다. 제대하자마자 학교를 중퇴하고 패션 학교 '에스모드 서울'에 입학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돼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그를 가르쳤던 박윤정 에스모드 이사장은 "그보다 선(線)을 잘 쓰는 친구는 없었다"고 했다.

졸업 후 '쉬퐁' '클럽 모나코' '닉스' 등 패션 회사에서 일하다 1997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옷가게 '론 커스텀'을 냈다. 스무 벌 정도를 걸어놓으면 꽉 찰 정도로 작은 가게. 정욱준은 "그때 처음 건 옷이 새까만 울로 만든 트렌치코트였다. 그 옷을 걸어놓고 바라볼 때의 희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2007년 파리로 날아갔다. 트렌치코트를 낱낱이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트렌치코트의 일부분을 떼어 조끼로, 점프 슈트(상의와 바지가 하나로 붙은 옷)로 재조립하고, 트렌치코트 위에 또 다른 트렌치코트를 겹치는 작업도 했다. 해외 평단은 이런 '준지'(정욱준이 해외에서 사용하는 브랜드)의 컬렉션에 열광했다. 패션 거장(巨匠) 칼 라거펠트가 '준지' 옷을 입고 2008년 3월 펜디 컬렉션 피날레 무대에 서고, 미국 힙합 가수인 카니예 웨스트가 '준지'의 팬임을 고백할 정도. 2011년부터는 제일모직 남성복 총괄 디렉터로 일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지만 정작 정욱준은 "난 아직도 10점 만점에 5점"이라 했다.

"수십, 수백 년이 흘러도 트렌치코트는 사랑받을 옷이다. 이 클래식한 옷을 들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컬렉션을 보여주고 싶다. 이미 하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아직 하고 싶은 작업의 반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