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

＃1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서 생존자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기차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꼬리 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뒹굴고 있는 앞쪽 칸으로 나뉜다. 꼬리 칸의 탑승객들과 그들의 지도자 커티스는 폭동을 일으키며 기차를 만든 윌퍼드를 찾아 기차 맨 앞칸으로 전진(前進)한다.

＃2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 청취자가 전화를 한다. 그는 마포대교를 폭파한 뒤 다리에 남아 있는 시민을 인질로 삼는다. 그의 요구 조건은 선진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마포대교 보수공사에 동원된 일용직 노동자 세 명이 강에 빠져 죽었으니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것. 평생 노동을 하며 성실히 살아온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게 테러범의 주장이다.

하나의 유령이 극장가를 배회하고 있다. '계급투쟁'이란 유령이. 31일 개봉한 '설국열차'(감독 봉준호)와 '더 테러 라이브'(김병우)는 각각 공상과학(SF)과 스릴러로 장르는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계급투쟁을 노골적으로 그리고 있다. 해묵은 이념 서적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계급투쟁이 극장가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 성수기 블록버스터에 등장했다.

◇한국도, 미국 영화도 1:99

한국 영화뿐만 아니다. 이번 달 29일 개봉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엘리시움'(닐 블롬캠프)도 140년 후 버려진 지구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우주의 지상 낙원 '엘리시움'에 사는 선택받은 사람들 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다. 6월 말 개봉한 '코스모폴리스'(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역시 2008년 금융 위기와 2011년의 '오큐파이'운동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수억달러를 가진 금융자본가가 리무진을 타고서 경제 위기와 양극화에 분노한 시민이 폭동을 일으키는 뉴욕시내를 돌아다니는 게 이 영화의 큰 얼개다.

대중을 상대하려면 1％보다는 99％에게 공감을 얻는 소재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계급투쟁이 상업 영화의 소재로 등장한 건 필연에 가깝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상업 영화에서는 확실한 갈등이나 충돌이 있어야 한다. 냉전시대에는 외부 세력의 위협이 가장 인기 있는 소재였지만 지금은 내부적인 갈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그중에서도 계급적 갈등이 다수의 관객에게 가장 와 닿을 것이다"고 했다.

이민과 의료제도 문제를 담은 '엘리시움'을 연출한 블롬캠프 감독은 "이 영화는 미래사회를 그린 SF가 아니다. 우리의 현재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부조리한 시스템이 현실과 맞아떨어지면서 역설적으로 대중은 계급투쟁을 소비하고, 혁명이 상업성을 갖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국적을 불문하고 대중이 경제적 양극화와 금융자본주의의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반적으로 경제 수준이 높아졌지만 계급적 갈등은 과거보다 더 심해지고, 사람들이 느끼는 초조와 불안은 더 확산됐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全)지구적 현상"이라고 했다. "대중이 이런 현실을 인지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중영화가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이젠 계급투쟁도 팔리는 소재"

이 영화들은 계급투쟁이란 뜨거운 재료를 차갑게 요리한다. 어느 한 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설국열차'에서 기차의 계급제도를 만든 윌퍼드가 설파하는 논리는 아주 정교해서 반란군의 지도자도 여기에 깜빡 넘어간다. '더 테러 라이브'도 계급투쟁의 수단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테러라는 점 때문에 테러범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비(非)상업 영화에서 계급투쟁이란 소재를 '프로파간다'(선전)나 교육처럼 다루던 방식에서 한참 진화(進化)한 셈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정색할 필요없이 적당히 감정이입을 하면서 SF나 액션, 스릴러의 재미를 즐기게 된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씨는 "예전에는 학문적 배경이나 이념 등을 동원해서 계급투쟁을 다뤘다. 하지만 요즘 대중들도 계급적 모순에 대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상업 영화의 범주 안에서 충분히 대중성과 흥행성을 갖고 있다. '계급투쟁'을 어려운 거대 담론이라고 외면하던 관객들도 '설국열차'나 '더 테러 라이브'를 '요즘 얘기를 하는 재밌는 영화'라고 받아들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