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워킹맘들 먼저 퇴근하실게요"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 직장 여성들은 으레 커피를 탔고, 결혼 후 배가 불러오면 전전긍긍하다 회사를 관뒀다.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까지 드물게 회사에서 살아남았다면 퇴근 무렵 전화로 "미안해, 엄마 늦어"라고 숨죽여 말하기 일쑤였다.

한국GM도 그랬다. 자동차 회사여서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주의적 문화가 남아 있었다. 그런 회사에 최근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들은 별일 없으면 오후 5시에 먼저 일어나 "들어갑니다"라고 할 수 있고, 임신하면 팀장 재량에 따라 재택근무도 할 수 있다. 여성들의 승진 속도도 빨라졌다. 업계 최고 대우를 받는 현대차 여직원들조차 "한국GM에 남는 자리 없느냐"고 물을 정도다.

이 변화를 주도한 게 '워킹맘 3인방'. 한국GM 디자인센터 컬러·트림팀 남희정(40) 부장, 디자인 인테리어 2팀 황보영(37) 부장, 크로스차량 인테리어팀 최소연(37) 차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적어도 이제 우리 후배 여직원들은 '결혼해서', '아이 때문에' 회사 그만둔다는 말은 안 할 것"이라고 했다.

◇"발표도, 퇴근도 워킹맘 먼저"

만 네 살 아들 유치원 끝나는 시간에 맞추려면 5시엔 칼같이 퇴근해야 하는 최 차장에겐 매주 화요일이 고역이었다. 오후 4시에 시작하는 디자인센터 회의가 6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고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인정받는 그였지만 "정규 근무 시간(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 끝났으니 먼저 일어나겠다"는 말을 선뜻 꺼내기 어려웠다.

변화의 물꼬를 튼 건 최 차장이 낸 아이디어였다. "회의 첫 발표 순서에 워킹맘 팀장들을 먼저 세워달라"는 것. 덕분에 그는 발표를 먼저 끝내고 '칼퇴근' 할 수 있게 됐다. 회사가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건 그가 보여준 노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남들보다 두 시간 이른 오전 6시에 출근해 업무를 말끔히 처리해냈다. "애 때문에 일찍 퇴근하더니 실적이 별로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남들 출근하기 전인 오전 6~8시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하고 퇴근 시간에 당당히 퇴근하는 거죠." 그가 손 본 그래픽은 독일과 브라질 등 GM의 해외 조직에서도 가져다 쓸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GM 글로벌 연구·개발(R&D) 인력 중 0.1%에만 주는 상도 받았다.

◇"여자라서 못 다닌단 말 안 해요"

남 부장은 따르는 여자 후배들이 많다. 그는 장기간 불임으로 고통스러워하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했던 여자 후배에게 "내가 책임질 테니 재택근무하라"고 말한 걸로 회사에서 유명하다. "너무 아까웠어요. 실력도 좋고 일 욕심도 많은 후배인데." 미국 GM 본사에서도 재택근무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의 재택근무 지시로 후배는 임신과 출산의 기쁨을 맛보고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재택근무 지시를 할 때 10년 전 자신이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고 했다. "임신 사실이 들킬까 봐 두꺼운 옷을 입고 자리에만 앉아 있었어요. 그러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몸이 피곤하면 커다란 그림판 뒤에 숨어서 잤어요."

그의 업무에 대한 집중력은 회사에서도 유명하다. 점심도 도시락으로 때우며 일했을 정도다. 그는 아이 둘을 낳고 복직할 때마다 승진했다.

황 부장은 "하나하나의 사례들이 보이지 않던 장벽을 깨고 조직 문화를 바꾼다"면서 "용기 있는 여자 선배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GM 여사원들은 모두 여직원 권익 모임인 '여성위원회' 조직원이다. 한국GM은 최근까지 여성위원회 사무실을 사장실 바로 옆 방에 마련하고, 매월 사장과 정기 모임을 가졌다. 선배 여직원이 후배의 개별 멘토를 자처해 문제를 듣고 건의해주는 역할도 한다. "우리나라가 이젠 여성에 관한 한 제도적으로 미국보다 못할 건 없어요. 용기가 필요할 뿐이죠." 황 부장은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남자 상사에게 '커피 직접 타드세요'라고 얼굴 붉히는 대신 슬며시 종이컵을 가져다 놓았듯 갈등 없이 분위기를 바꾸는 현명한 지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