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초면 세탁기가… LG, 세계 1등 비결은 '레고블록'제조공정

경남 창원의 LG전자 가전사업본부 제2공장. 흰색 2층 건물로 들어서자 프레스가 철판을 눌러 세탁기 외관 케이스를 찍어 내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세탁기 사업부 류재철 상무는 "여기가 LG전자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이라고 말했다. 프레스가 철판을 찍어 누를 때 나는 소음은 95데시벨. 기차가 옆으로 지나갈 때 나는 소음(90데시벨)보다 크다. 소리를 질러야 대화가 가능할 정도다.

◇세계 1등의 비결은 장난감 레고

세탁기 사업부는 LG전자에서 가장 소란스럽고 영업 이익률도 가장 높은 곳이다. LG전자는 세계 세탁기 시장 1위 업체. 작년에 1439만대를 팔아 세계 시장점유율 10%(매출액 기준)를 기록했다. 2008년부터 줄곧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류 상무는 "세탁기 사업부 영업 이익률은 경쟁 업체인 미국 월풀이나 GE보다 4~5% 높다"고 말했다.

본래 가전 사업은 이익이 박하다. 영업 이익률이 4%만 나와도 세계 최고 수준. 그러나 LG전자 세탁기 사업부 영업 이익률은 8%가 넘는다. LG전자 조성진 사장은 "고수익 비결은 아이들의 장난감 '레고'에서 찾았다"고 했다.

2005년 1월 세탁기 사업부장을 맡은 조 사장은 연구·제조 핵심 인력을 사업부장실로 불러 레고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레고 블록은 서로 모양이 달라도 모두 연결이 가능하다. 각 블록의 기본 형태는 단순하고 종류도 적지만 서로 연결해 수천 가지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회의 결론은 "모든 작업을 표준화·단순화·공용화해 3~4개 블록만 연결하면 세탁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것.

◇모듈화 후 생산량 5.4배 증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모듈 개념이다. 2005년 LG전자는 세탁기 제조 공정을 모듈화했다. 가전 사업에 모듈 개념을 도입한 건 세계 최초였다. LG전자 세탁기는 3~4개 모듈로 만든다. 레고로 치면 블록인데, 모듈 3개를 연결하면 세탁기가 하나 나온다.

이후 생산성이 높아졌다. 2005년 제2공장 연간 생산량은 100만대였으나 지금은 540만대로 늘어났다. 지금도 매년 매출이 10%씩 늘어난다. 반면 생산라인 길이는 3분의 2로 줄었다. 공정이 단순해졌기 때문이다.

LG전자 제2공장 생산라인은 '9초 라인'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각 라인에서 9초당 세탁기 한 대가 나온다는 의미다. 경쟁 업체보다 거의 2배 빠른 속도다.

모듈화와 함께 첨단 제조 기술이 제2공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있었다. 생산라인에는 길이 1m 정도 로봇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장난감 자동차처럼 생긴 로봇 뒤에는 각종 모듈과 부품이 실린 카트가 매달려 있다. 로봇은 정해진 시간에 카트를 생산라인에 떨어뜨리고 다시 다른 카트를 운반하기 위해 돌아간다. 라인에 있는 작업자는 로봇이 가져 온 카트에서 모듈을 집어 라인을 따라 흘러오는 제품에 끼운다.

보통 국내 제조업체들은 해외에 생산기지를 만들면 프리미엄 제품은 국내에서, 보급형 제품은 해외에서 생산하는 전략을 쓴다. LG전자 세탁기 사업부는 모듈화로 이런 상식을 깼다. 회사 관계자는 "같은 제품을 국내외 11개 생산법인이 생산한다"며 "환율 등을 고려해 어느 곳에서 생산할지 조절한다"고 말했다. 모듈화 덕분에 이런 방식을 써도 균일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LG전자는 조성진 세탁기 사업부장을 가전사업본부 전체를 총괄하는 사장으로 임명했다. 세탁기 1등의 비결과 경험을 가전사업본부 전체에 전파하란 것이었다. LG전자 가전사업본부 내 모든 사업부는 지금 제품의 모듈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모듈화는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한 작업이다. 실제 생산에 모듈 개념을 적용하려면 지금 멀쩡히 잘 파는 제품의 설계부터 생산라인·애프터서비스를 위한 부품 재고까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 당장의 손해를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어서 책임자의 확실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조성진 사장은 "갈 길은 멀지만 모든 제품을 세계 1등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반드시 이루겠다"고 말했다.


☞모듈(module)

다양한 부품을 미리 조립해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 예컨대 휴대전화에서는 액정 모듈, 카메라 모듈과 같이 휴대폰의 특정 기능을 구현하는 부품의 집합이다. LG전자 세탁기 사업부가 가전업계에선 처음으로 모듈 개념을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