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 그리기까지 관찰만 1년

옥(玉)색 화선지처럼 야들야들한 나뭇잎을 스쳐 지나간 햇살이 한풀 꺾이더니 은은하게 흙에 내린다. 이따금 손가락만 한 벌새가 춤추듯 날아다니는 이 숲에는 따뜻하면서도 상쾌한 공기가 흐른다. '이곳은 대체 어딘가'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에야 깨닫게 된다. 이건 꿈도, 생시도 아닌 애니메이션이다. 블루스카이의 장편 애니메이션 '에픽'(7일 개봉)은 실제보다 더 선명하고 생기있는 숲을 만들어냈다. 3D로도 상영하는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실사(實寫)를 능가할 수 있는 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에픽'의 줄거리와 캐릭터는 생생하고 입체적인 화면에 비해 단조롭다. 선악이 뚜렷하며 권선징악과 자연보호 같은 고전적이고 무난한 주제를 다룬다. 숲의 여왕 타라가 후계자를 지목하는 날, 숲을 파괴하려는 맨드레이크 일당에게 공격을 받는다. 숲을 연구하는 아버지를 따라온 소녀 엠케이(MK)는 이상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숲의 정령들처럼 작아지고, 타라로부터 숲을 지킬 꽃봉오리를 넘겨받는다. MK는 노드, 로닌 등 숲의 전사들과 함께 숲을 지키기 위해 맨드레이크 일당과 싸운다.

'에픽'의 크리스 웨지 감독은 "15년 전 한 미술 전시에서 세밀하게 묘사된 숲 그림을 보고 마법 같은 숲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후 친구이자 동료인 윌리엄 조이스가 '리프맨과 용감한 곤충 친구들'이란 동화책을 내자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그와 30명의 애니메이터는 인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문명을 가진 작은 생물들의 세계를 상상하기 위해 1년 동안 숲 속을 돌아다니며 동식물을 채집하고 관찰했다. 웨지 감독 사무실에는 당시 채집했던 박쥐와 곤충 표본들이 가득하다. 수석 캐릭터 디자이너인 이상준씨는 "우리가 목표로 한 건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이 숲 속에 떨어진 나뭇잎을 보고 영화의 감흥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손가락 길이의 벌새를 탄 숲의 전사 리프맨과 박쥐를 탄 맨드레이크 일당이 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데는 캐릭터들의 크기 차이를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생물들을 숲이란 거대한 공간과 대비시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인간을 바라볼 때 느낌을 표현한 장면은 기발하다. 이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필요했던 건 결국 시간. '에픽'의 애니메이터인 데이비드 슬로스는 "3초 길이의 한 장면을 만드는 데 한 캐릭터당 최소 5개의 자세가 있어야 하고, 이들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3초 장면에 1~2주가 필요한데, 결국 인내 싸움이었다"고 했다. 라이팅 수퍼바이저(조명 감독)인 성지연씨는 "나무껍질이 벗겨지면서 곤충처럼 생긴 맨드레이크 일당이 튀어나오는 장관(壯觀)을 만드는 데는 수퍼컴퓨터를 동원해 한 달 걸렸다"고 했다.

☞블루스카이

1987년 세워진 블루스카이는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사보다 늦게 시작한 편이다. 광고와 영화의 특수효과를 주로 만들어온 이 회사는 2002년 ‘아이스 에이지’를 내놓으면서 픽사와 드림웍스를 잇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거듭난다. ‘에픽’ ‘아이스 에이지’ ‘리오’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 현실적 묘사와 생동감 넘치는 액션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는 기술이 장기다. ‘블루스카이’ 창업자이기도 한 웨지 감독은 “우리들이 하는 일의 바탕엔 항상 기술이 있었다. 기술과 예술, 그리고 비즈니스가 만들어낸 르네상스가 바로 블루스카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