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 산행 중 만난 청아한 소리… 不渡로 지친 마음 보듬었다

민간 국악관현악단 창단과 국악 명인 후원을 통해 다채로운 국악 공연을 열고 있는 나를 많은 사람은 '국악 전도사'로 부른다. 지금은 국악과 맺은 인연이 참으로 자연스럽지만 그 시작이 결코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내가 선친의 뒤를 이어 경영하던 크라운제과는 IMF 외환 위기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부도를 맞았다. 돌이켜보면 회사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금 운용 과정에서 실수로 발생한 위기였다. 당시 회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채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우리의 잠재력과 건실함을 설명하고 믿어 달라고 호소했다. 모든 임직원과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해 마침내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의 부도'니 '흑자 부도'니 하고 의심하는 사람 때문에 참담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진력하던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었고, 의심의 눈으로 나를 쳐다볼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외출도 잘 하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즐기던 외출은 등산이었다. 산에 오르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곤 했다. 어느 날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을 홀로 오르다 잠시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선율이 들렸다. 구슬프면서도 한없이 청아한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요한 산속에서 울리는 선율은 내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일으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대금 소리였다. 은은하게 들리는 대금 소리는 당시 억울하고 분했던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주며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다. 말 그대로 힐링이 되었다.

이날 경험한 대금 소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나는 직접 배워 볼 요량으로 명인을 찾아갔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과 함께 배우는 것이 어려워 젊은 대금 연주자를 독선생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대금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금방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굳어진 손가락으로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것은 참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대금보다 비교적 연주하기 쉬운 단소로 바꿔 봤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번 시작한 것이니만큼 열심히 노력하여 한두 곡 정도는 연주할 수준이 되었다.

국악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국악계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국악 공연을 선보일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국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지 않아 쉽사리 공연을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독선생과 의기투합해 국악 공연을 열기로 결심했다. '만약 관객이 적으면 회사 임직원들에게라도 좋은 공연을 보여주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2001년 국립국악원에서 국악 공연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업사원들에게 초대장을 건네주면서 거래처 점주들에게 전하라고 했지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공연 당일 임직원들을 미리 입장시켜 좌석을 가득 채운 뒤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연 초대장을 손에 쥔 어르신이 한 분 두 분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확인해보니 거래처 점주들에게 보낸 초대장이 그 부모님들께 전달된 것이었다. 좌석이 모자라 미리 앉아 있던 임직원 대부분이 자리를 양보해야 될 만큼 많은 분이 오셨다. 국악 공연을 즐기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다.

다음 날 나는 또 한 번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영업 담당 임원이 전하기를 거래처 점주들이 "앞으로 크라운제과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는 것이었다. 국악 공연에 오셨던 어르신들이 "훌륭한 국악 공연에 초청해 주어 고맙다"며 우리 회사를 더 많이 도와주라고 자녀들에게 신신당부했다는 것이다. 국악 공연 이후 영업사원들을 각별하게 맞아주는 점주가 늘어나면서 회사 운영에도 신바람이 났다.

그 공연 이후에도 점주들과 고객들에게 국악 공연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국악 명인들이 전통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대보름 명인전', 젊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퓨전 국악 공연을 펼치는 '창신제', 일본 도쿄에서 새롭게 국악 한류를 이끌어나가는 발판을 마련한 '한국의 풍류' 등 다채로운 공연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특히 2007년에는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국악관현악단인 '락음국악단'을 창설해 국악인들을 후원·양성하고 매년 두 차례 정기 연주회를 열고 있다.

올 6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전승되고 있는 50여 가지 아리랑을 겨루는 '제1회 아리랑 경연대회'를 예술의전당에서 개최해 사라져 가는 아리랑 발굴 및 계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는 10월에는 광화문광장-서울시청을 중심으로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2013 서울 아리랑 페스티벌'을 열 계획이다. 국악에 생소한 젊은 사람들과 아리랑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다 같이 신명 나게 놀 수 있는 한마당을 제공하고자 한다.

국악은 해태제과를 인수해 크라운-해태제과그룹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 이후 임직원 모두를 하나로 화합하게 만드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100명이 북을 치며 판소리를 함께 부르는 '100인 판소리 떼창' 공연은 임직원들이 직접 판소리를 배우고 크고 작은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사가 한마음이 되었던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이 공연은 '최다 인원 판소리 떼창'으로 기네스북에까지 등재됐다.

제과회사 회장이 과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국악 알리기에 열을 올리는 것을 많은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국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회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재기의 발판이자 크라운-해태제과 제품을 사랑해주는 고객들에게 작게나마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실의에 빠져 산을 오르며 우연히 들었던 대금 소리가 오늘의 제과 전문 그룹 크라운-해태제과를 만들었고 고객과 함께하는 행복 경영의 마중물이 된 것이다.


[윤영달 회장은 누구]

2005년 해태제과 인수 후 회장에 취임… 국악 등 문화예술인 적극 후원

윤영달(尹泳達·68)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은 크라운제과 창업주인 고(故) 윤태현(尹台鉉) 회장의 장남이다.

서울고와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윤 회장은 1971년 크라운제과 이사, 1995년엔 대표이사가 됐다. IMF 외환 위기를 비교적 빨리 극복하고, 2005년에는 당시 제과 업계 2위였던 해태제과를 인수해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윤 회장은 예술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오픈아트페어 조직위원장, 2010년과 2011년에는 아트광주 조직위원장과 제81회 춘향제전위원장을 지냈다. 2012년과 2013년에는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조직위원장을 맡아 문화 예술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특히 국악에 대한 지원을 많이 하고 있다. 저변 확대를 위한 각종 음악회 개최, 젊은 국악인 지원 등이다. 윤 회장은 2011년에는 국악 지원 활동을 인정받아 전 세계 10여명에게 주는 몽블랑 문화 예술 후원자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