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경기도 파주 民統線내 통일촌 ‘40년 證人’ 민태승씨

35세 이하인 예비군 대상자 중 사상 건전하면서, 부채 없고 盜癖 없어야 통일촌 입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땐 전쟁 나는 줄 알고 불안했지만 요즘은 태평한 편이죠”

“지휘관 바뀔 때마다 통제 심해져 주민들을 일일이 검문하다가 항의하면 풀어주는 식을 반복”

 

임진강 위 '통일대교'를 건너면 이정표가 나온다. 직진하면 개성(開城), 왼쪽으로는 '통일촌'이다. 개성공단 7차 회담이 열려 타결된 날, '통일촌'에도 행사가 있었다. 40년 전 바로 이날 민간통제선 마을에 입주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여기 군내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터졌어요. 휴전협정 직후 '군사작전'을 위해 마을 주민들을 강제 철수시켰지요. '일주일 있다가 다시 들어오라'고 한 뒤 영영 내보낸 거죠. 고향을 떠나 멀리 가지 못하고 임진강을 건너와 피란살이를 했지요. 그러다가 '통일촌'이 조성되자 고향을 찾아서 온 거죠."

민태승(71)씨는 통일촌의 산증인이다. 그는 마을 이장과 파주시의원, 파주문화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파주장단콩영농조합 대표를 맡고 있다.

―통일촌에 들어오기 전에는 무얼 하고 있었나요?

"당시 파주군에서 공무원을 했어요. 우연히 신문에서 '정착촌'공고를 봤어요. 부모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요. 국가에서 집과 농지까지 분배해준다고 하니까요. 7남매 맏이인 나도 공무원 벌이로는 가족 봉양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때는 쌀값이 비싸 공무원 하기보다 농사짓는 게 훨씬 나았지요. 위험한 것이야 임진강을 두고 여기나 저기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입주 조건이 까다롭고, 경쟁률은높았다면서요?

"경쟁률이 3대1쯤 됐을 겁니다. 건강한 기혼자로서 35세 이하인 예비군 대상자여야 했지요. 사상이 건전하고, 부채가 없고, 도벽(盜癖)이 없어야 하고…, 열두 가지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어요. 입주할 때 부모나 형제도 대동하지 못하게 했어요. 아내와 갓 낳은 첫 딸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뒤 2년쯤 지나서야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지요."

통일촌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북한의 '선전(宣傳)용 마을'에 대응하기 위해 조성했다. 북쪽에서 바라보면 남한이 더 살기 좋아 보이게끔 당시로는 현대식인 '슬레이트 집'을 산등성이에 지었다.

이제 그 집들은 빛바랜 흑백사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스팔트 도로가 난 마을에는 별장이나 펜션으로 불러도 좋을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방공호와 무기고 등은 '관광 상품' 용도로 보존해놓았다.

―입주 당시 풍경은 어떠했습니까?

"산등성이를 불도저로 밀어 15평짜리 슬레이트 집을 지어놓았고 평지를 만들어놓았어요. 자기가 가질 집과 땅은 추첨으로 결정했지요. 동네 주위로는 잡초와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어요. 여름철이라 모기 떼가 들끓었어요. 해가 떠 있을 때 얼른 저녁을 지어 먹고는 모기장 속에 들어가 지냈어요."

―집과 농토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막막한 기분도 들었겠군요.

"어두워지면 동네 바깥을 못 다니게 했어요. 지금도 전답 외에는 다른 데 갈 일이 없어요. 정부에서 타이탄 트럭을 한 대 줘서 주민들이 문산읍에 나가 장을 보도록 해줬어요. 그때는 주위에 미군 부대가 있어 지금보다 버스는 자주 다녔어요. 이제 모두 철수했지만."

통일촌에는 이 지역을 관할한 육군 1사단의 제대군인 40가구, 실향민 40가구, 교회와 초등학교 사택 4가구 등 모두 84가구가 입주했다.

"민통선 지역이니 긴장도 많이 됐지요. 주민들끼리 감시나 비상 연락을 위해 8개 조(組)로 편성됐어요. 조당 10명으로 하사관(현 부사관) 3명, 장교 2명, 민간인 5명으로 짜여 있었지요."

―제대군인들과 실향민들이 섞여 살았으니 갈등도 있었겠는데요.

"제대군인들은 팔도(八道)에서 왔으니 자연 마을은 아니었지요. 처음에는 이들이 예비군 중대장과 이장을 모두 맡았어요. 실향민들보다 나이가 평균 열 살쯤 많았고요. 어쨌든 이들이 헤게모니를 잡은 거죠. 이 때문에 감정 대립이 심했어요. 장교 출신과 하사관 출신 사이에서도 신경전이 있었어요. 하사관들은 '사회에 나왔어도 계급을 따지느냐'고 했지요. 지금은 이런 갈등이 다 사라졌어요. 실향민들은 70대가 됐고, 군 출신들은 80대 노인이 됐어요."

―통일촌의 모델은 전투 능력을 갖춘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kibbutz) '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어요. 우리도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를 내걸었지요. 처음 일 년 동안에는 주민들은 저녁마다 소총을 들고 초소에서 보초를 섰어요. 갑자기 비상을 걸기도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사격과 총검술, 제식훈련, 각개전투를 했어요. 주부들도 예비군에 편성돼 사격 훈련을 했으니까요."

―해마다 비상식량을 챙겨서 임진강 다리를 건너 파주읍까지 피란 가는 훈련도 있었다면서요?

"초창기 매년 그렇게 했지요."

―민통선 안에서 살면 후방보다 전쟁의 위협에 더 예민해집니까?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1976년)이 났을 때는 정말 전쟁이 나는 줄 알고 불안했어요. 그때는 후방과 연락을 못 하게 주민들의 전화도 다 끊었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이 자주 벌어지면서 우리는 만성이 됐어요, 연평도 포격이나 북한의 도발 위협이 있었을 때도 후방에 있는 친척들은 불안해서 전화를 걸어와요. 우리는 '그래 봐야 뭐 별일 있겠느냐'며 오히려 태평한 편입니다. 그럴 때면 출입 통제가 심해져 다만 불편할 뿐이지요."

―논밭을 개간하면서 지뢰 폭발 사고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뢰가 폭발해 주민 1명이 숨지고 2명은 발목이 잘렸어요. 마을에서 좀 떨어진 콩밭에서는 대(對)전차 지뢰가 터지기도 했지요. 못 견디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요. 매년 같은 전답에서 농사를 짓는데 괜찮다가 갑자기 터지니, 그런 사고도 운(運) 같았어요."

―여기서 살면 세제(稅制)나 자녀 대학 진학 때 혜택이 있지요?

"전혀 없어요. 입주 때 분배받은 주택과 땅이 혜택이었지요. 그 땅도 우리에게 준 걸로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1983년 특별조치법에 따라 이곳의 원래 땅주인이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했다면서요?

"처음 땅을 분배받았을 때 자기 땅으로 알고 개간해 농사를 지어왔는데, 뒤늦게 땅을 내놓으라고 하니. 주민들이 '총알받이로 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럴 수 있나'며 반발한 거죠. 정부에서는 마을에 7억6000만원을 융자해줬어요. 그 돈으로 농토를 매입하라고 했지요. 주인이 안 팔겠다고 하면 내줄 수밖에 없었어요. 소유주가 안 나타난 마을 땅은 국유화됐지요. 자산공사가 맡아서 임대를 주거나 팔았어요. 주민들은 '우리가 개간한 땅이니까 과거 공시지가로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아직 이 문제가 안 풀렸습니다."

―그래도 막상 와보니 통일촌은 부촌(富村) 같습니다. 임진각광장에서 열리는 '파주장단콩축제'로도 유명하죠. 어떻게 콩을 심게 됐나요?

"벼농사를 지으면서 인삼밭을 했어요. 인삼은 지력(地力) 문제로 한 번씩 밭을 쉬어줘야 해요. 그 시기에 콩을 심게 된 거죠. 20년 전입니다. 콩 작황이 좋았는데 판로가 없었어요. 그때 군수님이 '웰빙 바람이 부니 콩 축제를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별 기대 안 했는데 그해 5000명이 몰려왔어요. 이렇게 시작한 장단콩축제가 올해로 17회가 됩니다."

―장단콩은 다른 콩에 비해 가격이 2~3배쯤 된다는군요. 품종이 다릅니까?

"(이 대목은 이완배 이장이 답변했다) 조선시대 '장단백목'이라는 콩 품종이 있었지만 명맥이 끊겼어요. 소비자들은 장단콩 종자가 따로 있는 줄 아는데, 사실 여기 심는 것도 '대원' '태광' 같은 일반 콩 품종입니다. 당시 콩 축제를 열기로 하고 이름을 지어야 할 때, 과거에 이 마을이 장단군(郡)에 속해 있어 내가 '장단콩'으로 이름 지었던 거죠."

―콩 품종이 다르지 않은데, '장단콩' 작명 덕분에 비싸게 팔 수 있었다는 뜻 같군요.

"같은 품종이지만, 장단 지역은 일교차가 심하고 물이 잘 빠지는 마사토여서 콩이 단단하게 여물어 고소한 맛이 납니다."

―여기 살면서 가장 불편한 점은요?

"역시 출입 문제지요. 관문(통일대교 검문소)은 자정이면 닫습니다. 지금은 자가용이라도 있었지, 옛날에는 문산 읍내에 볼일 보러 나갔다가 밤 10시 버스가 끊기면 아예 자고 와야 했어요. 요즘에는 자정이 넘어도 들어올 수는 있어요. 그런데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은 직후에 통금 조치가 다시 내려졌어요. 그때 주민들이 항의해서 며칠 만에 풀리기는 했지만."

―출입 절차가 까다로워 외부인들의 방문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은 행사가 아니면 평소 마을 안에는 외부인들이 거의 없어요.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방문하려면 번거롭지요. 방문자가 오면 우리가 검문소까지 직접 나가서 신분을 확인해주고 데려와야 합니다. 옛날에는 '언제 누가 들어온다'고 미리 군부대에 신청해야 했어요. 승인이 안 떨어지면 방문할 수가 없었지요."

―안보 차원에서 군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해는 하지만, 여기서 늘 살고 있는 주민들도 생각해줘야지요. 주택 신축 등도 최종적으로 군부대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느슨해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조금도 나아진 게 없어요. 특히 지휘관이 바뀔 때마다 더 죕니다. 과거에는 주민 차량에 비표를 붙여 쉽게 통과했어요. 한번은 지휘관이 바뀌자 그 비표를 인정하지 않고 일일이 검문했어요.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없던 일이 됐어요."

―일상에서 통제받고 있다는 걸 느낍니까?

"40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새삼 그런 느낌은 없지요. 사람은 환경에 맞춰 적응하니까요. 어떨 때 잠깐 불편할 뿐이지요."

―이곳 주민들은 대북 전단을 날리는 보수 단체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것 같더군요.

"임진각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오는 단체 관광객들이 있어요. 제3 땅굴과 도라산전망대, 도라산역을 거쳐 여기까지 와서는 마을 입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농산물도 사 갑니다. 그 식당은 마을 주민들이 투자했지요. 안보 관광객들 덕분에 일 년에 200만~300만원씩 이익배당을 받아요. 임진각에서 대북 풍선을 날리면 북한에서 포(砲)를 쏜다고 위협하고 우리 군에서는 마을을 통제합니다. 출입이 막히고 관광객들도 끊기니 안 좋아할 수밖에요."

―자녀들은 모두 여기서 분가해 삽니까?

"딸만 셋인데 모두 결혼해 나가 살고 있어요. 하지만 내 두 동생이 여기서 살고, 부친(92)도 생존해 계세요."

현재 마을 가구 주민은 157가구로 약 500명이다. 마을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한때 학생 수가 줄어들어 폐교(廢校) 결정이 났지만 주민들 항의로 살아남았다. 전체 학생은 40명 남짓이다. 학생 수에 비해 교사가 많아 교육 여건이 좋다며 문산읍에 사는 학생들까지 끌어들인 결과다.

이날 '통일촌 40년' 행사를 위해 무대와 천막 대여섯 동이 설치됐다. 쇠를 녹일 폭염 속에서도 야외 행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김문수 경기지사, 황진하 의원, 이인재 파주시장 등이 차례로 축사를 했다. 땀이 물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선임기자

 

■조선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신문 제작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투고와 제보는 연락처를 기재해 아래 주소로 보내주십시오. ‘발언대’ 원고도 환영합니다.
우110-604 서울 광화문 우체국 사서함414 조선일보사 독자서비스센터
이메일 opinion@chosun.com
fax 02)724-6299 ☎02)724-62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