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 선임 관철… 기관투자자, 제 목소리 내기 시작하나

지난 6월 25일 한라그룹의 만도는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김대식 한양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이 건은 상장회사의 통상적인 사외이사 선임과 달리 증시의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는 대주주가 외부 주주를 대표하는 독립적인 사외이사로 추천됐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5월 15일 만도가 독립적인 사외이사를 선임하라는 펀드 등 기관투자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주가가 4.7% 급등하기도 했다. 만도는 계열사인 한라건설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4월 중순 이후 주가가 급락했었다. 이에 만도에 투자한 한 자산운용사가 법원에 만도의 편법적인 한라건설 지원을 막아달라는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는 등 행동에 나서자, 만도가 기관투자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사례는 펀드 행동주의와 관련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국민연금 같은 공적 연기금이 아닌 일반 기관투자자가 외부 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대화를 통해 경영진이 받아들이게끔 한 최초의 사례다.

◇미국 등에선 펀드 행동주의 강화되는 추세

지난 5년간 국내 시장에서 자산운용사, 보험사, 은행 등 기관투자자가 상장회사의 주주총회에서 반대투표를 행사한 안건의 비율은 전체 안건의 0.5%를 넘은 적이 없다. 상당수 대형 회사에서 5% 이상 주요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조차 지금까지 한 번도 사외이사를 추천한 사례가 없다.

이처럼 펀드 행동주의가 척박한 우리 환경에서 자산운용사가 독립 사외이사를 뽑아 달라고 한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는 건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만도의 경우 당시 국민연금이 다른 기관투자자의 움직임에 동의 의사를 표시하는 등 기관투자자 간 합의와 연대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지배주주의 직간접 지분이 많은 상황에서 굳이 과반이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서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일반 뮤추얼펀드가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행동에 나서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 운용사의 하나인 피델리티의 콘트라펀드는 올해 씨티그룹의 임원 보수에 대한 권고투표에서 작년과 달리 반대표를 행사했다. 피델리티가 운용하는 펀드들이 주가지수인 러셀(Russell) 3000지수에 편입된 회사들의 임원 보수 안건에서 경영진의 제안에 반대한 비율은 10%를 넘는다.

또 미국에서 2007~2009년 사회·환경 이슈와 관련된 주주제안 총 639건 중 10%가 넘는 67건이 펀드가 제안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펀드는 연기금 등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평가에도, 2009년 기준으로 전체 주총 안건의 9.4%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렇게 미국에서 뮤추얼펀드가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출하고 행동에 나서게 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헤지펀드 등의 수익률이 시장 평균을 상회한다는 결과가 확인된 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09~2012년 행동주의 헤지펀드 40개사로 구성한 지수(AI Index)의 누적수익률이 세계 평균 주가지수(MSCI World Index) 수익률보다 27.2%포인트(연평균 6.8%포인트) 높았다. 이에 따라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헤지펀드 규모는 2008년 323억달러에서 작년 655억달러로 배 이상 늘었다.

2003년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공시 규정을 강화함에 따라 의결권 행사와 관련하여 뮤추얼펀드에 대한 감시가 용이해진 점도 있다. 뮤추얼펀드는 의결권 행사 관련 정책과 가이드라인을 모두 공개해야 하며, 투자대상 회사에 의결권을 행사한 세부 내용도 밝혀야 한다. 의결권 행사가 부실한 운용사에 대해 투자자들은 집단소송으로 얼마든지 책임을 추궁할 수도 있다.

◇국내에서 펀드 행동주의 강화되려면

우리나라에서 펀드 행동주의가 강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의문점이 많다. 대다수 일반 기관투자자는 대규모 기업집단이나 금융그룹 소속이어서 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과 거래 관계가 있는 금융그룹 소속 자산운용사가 그 기업 경영진이 제시한 주총 안건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사례의 자산운용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운용사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계열관계를 직접 끊어내기 어렵다면 그로 인한 이해 상충을 완화하는 다른 수단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선진국 사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선 펀드의 의결권 행사에 대한 세부 지침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이를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공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므로 이해 상충 가능성이나 이로 인한 불신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또 하나의 방안으로 의결권 정책을 사전에 마련해 이를 공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사가 부닥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해 상충의 상황을 언급하고, 각각의 경우 이해 상충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명시하게 해야 한다.

펀드 투자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돈을 맡긴 기관투자자가 자신들을 대신해 의결권 행사에 충실히 나서는지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기관투자자에 가하는 가장 강력한 시장 압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