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는 죽었다? 쓰고픈 사람만 쓰는 지금이 르네상스"

새로운 시인(詩人) 등단 제도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에, 시인 김정환(59)의 서울 당산동 집으로 달려갔다. 3개월 전 '거푸집 연주'까지 시집 19권을 낸 시인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정력적 저술가. 인문서·클래식 음악 해설서·각종 번역서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200권을 넘게 썼다.

32도의 폭염이 도심을 달구던 19일 오후, 시인은 꼭대기 층인 아파트 13층 자택에서 '난닝구'와 '파자마' 차림으로 번역 중이었다. 에어컨 없는 거실 겸 집필실에는 바흐의 평균율이 흐르고, 시인은 등산용 컵에 꽁꽁 얼린 커피를 냉동실에서 꺼내왔다. 우선 그가 문학평론가 황현산, 시인 김혜순과 의기투합해 추진 중인 새로운 시도 이야기부터.

―계기는.

"신춘문예나 문예계간지는 기껏 5편 정도를 심사한다. 반짝이는 것 같아 뽑지만, 등단 후 곧 사라져버린 재능이 얼마나 많나. 이런 제도는 소위 문화 선진국에서는 없어진 지 오래다. 새 방식은 시집 한 권 분량을 투고 받아 결정하자는 것이다. 재능을 집중시키는 데도 좋고, 또 재능의 낭비를 막는 데도 좋다. 시인 김도언이 처음 아이디어를 냈고, 삼인 출판사에서 큰 결심을 해 줬다."

―문지나 창비 등 기존 유력 출판사에서도 해 본 시도 아닌가.

"투고작이 좋으면 내고 안 좋으면 내지 않는, 그런 기획이 아니다. (웃으며) 거저먹자는 기획이 아니라니까. 가능성이 보이면 장점과 단점에 대한 짧은 코멘트를 한다. 그러면 '악바리'들은 다시 고쳐서 보내와요. 지난 1년 6개월 동안 100권 넘는 투고작을 독회했다. 그중 한 12명 정도는 5회, 6회 이상 왔다갔다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중에는 기성 유명 문인도 있다. 올해 안으로 두 권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우리 문단이 진영 분할 및 할거로 협소화되고 저열화되고 있다는 우려를 자주 해 왔다. 점잖게 표현했지만, 결국 이념과 진영에 따라 편을 갈랐고, 전반적으로 문학 수준이 낮아졌다는 비판이다.

―이번 새 시도가 평소 비판과도 관련 있나.

"물론. 지금 우리 문학은 너무 협소하다. 가령 서정주를 말할 때, 한쪽은 서정주가 친일파다, 다른 쪽은 그게 서정주의 문학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이 반박으로만 날을 세운다. 문학에 대한 논의가 깊어질 수가 없다. 지금 외국의 시인들은 서정주, 김소월, 김수영의 합(合)이다. 그쯤 되어야 대가(大家)지. 그런데 우리는 진영에 따라 대가가 서로 다르다. 우리만 유독 그래. 내가 (진보적 문인 단체인) 작가회의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사람 중 하나지만, 작가회의도 한국 문학의 깊이를 더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외국에는 이런 일이 없다니까."

의외였다. 그는 1980년대 소위 민중시의 전위. 서울대 영문과 출신으로 투옥과 강제 징집을 거쳤고, 당대의 강력한 좌파 단체 중 하나였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의장을 7년간 했다. 90년대 초 분신 정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들의 추모시를 도맡아 쓴 것도 대부분 김정환이었다. 그는 "나니까 이런 말 할 자격이 조금은 있을 거다"라고 했다. 이야기를 좀 더 확장했다.

―그런 '자아비판'은 조금 뜻밖이다.

"우리는 독재에 항거하다가 독재에 휘둘린 세대다. 운동권이 정치권에 들어가고, 급기야 정권까지 획득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일본의 전공투(全共鬪) 세대 중에 정치한 사람이 누가 있나. (전공투였던) 하루키는 글을 썼다. 프랑스 68세대는 이후 철학으로 진행했고."

―같이 민주화 운동 한 사람들이 들으면 섭섭할 텐데.

"그래서 엄청나게 욕먹고 있지(웃음). 하지만 나는 그들이 오히려 낡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광주 이래로 사명감에 눌려버렸다. 나부터 그랬지만, 나는 80년대가 문학을 내팽개쳤던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회월(박영희) 이야기처럼,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지금도 똑같은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저러고 살까 싶다. 누구를 우스꽝스럽게 '씹고', 시사(時事) 몇 마디 이야기하는 게 비판의식이 아니다. 올바른 문학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지만, 진정한 비판의식은 늘 전망과, 그 전망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는 같은 관점으로 '문학의 위기'나 '문학의 축소' 운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문인들이 성명서를 쓰면 사람들이 귀담아들어 주던 80년대가 오히려 비정상이었다는 것. "문학이 근사해 보이니까 겉멋으로 문학하겠다고 그러던 시절이 있었는데, 겉멋으로 문학하는 사람이 없는 지금이 오히려 정상"이라면서 "진짜 문학이 좋아 남은 사람들만 있는 요즘이 오히려 시의 르네상스"라고 했다.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그는 어떻게 지내느냐는 소설가 원재훈(DJ)의 질문에 "훌륭하게 지낸다"고 답해 큰 웃음을 줬다. 그 근거는 이렇다. 40권 계획인 셰익스피어 전집은 23권째 번역을 마쳤고, 12권 예정인 세계 시인 전집은 엊그제 제9권 번역을 마무리했다. 두 달에 한 권의 스피드다.

필생의 사업으로 꿈꾸는 '어린이용 국어사전'은 'ㄱ' 분량을 마쳤는데 200자 원고지 3000쪽을 넘겼다. 어휘에 각종 인용문과 동시를 첨부하다 보니 이 정도 분량이 됐다는 것이다. 인터뷰는 두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 바흐의 평균율은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았고, 냉동 커피는 채 20%도 녹지 않았다. '김정환이라는 전집'을 대충이라도 이해하려면, 최소한 몇 잔의 얼음 커피가 더 필요할 듯한 8월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