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마트 가는건 옛날 얘기" 65세 이상, 5년 새 3배 늘어 비싼 식당 대신 도시락 싸와… 초등학교 동창회까지 열기도
"비행기 보면 여행 온 느낌… 출장 다닌 젊은 시절 생각나"
지난 16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4층. 할아버지·할머니 30명이 벤치에 앉아 활주로와 비행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또 한 대 뜬다!"
대한항공 보잉 747 여객기가 이륙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4층 한가운데 85㎡ 크기 '비선루' 정자에서는 할아버지·할머니 28명이 인천공항이 연 가야금 공연을 구경하고 있다. 정자에 젊은 사람은 2명뿐이다. 1층 밀레니엄홀 공연장엔 관람객 89명 중 80명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다. 남녀 가수 2명이 나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자 다 같이 박수를 쳤다.
사람이 덜 다니는 지하 1층엔 혼자 책을 보거나 잠을 자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많았다. 지팡이를 짚고 공항에서 걸으며 운동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2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4층에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 나누고 있다. 유난히 더운 올해 여름엔 인천공항을 찾아 피서를 즐기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이덕훈 기자
코레일 공항철도가 2010년 12월 서울역까지 완전 개통되면서 인천공항에서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늘고 있다. 유난히 더운 올해는 피서지로도 소문이 나 인기가 높다. 만 65세 이상 할아버지·할머니는 공항철도를 무료로 탈 수 있다.
공항철도 인천국제공항역에서 내린 할아버지·할머니는 2008년 7만7900명에서 지난해 25만3900명으로 5년 새 3배가 넘게 늘었다. 올해는 지난달까지 14만8700명으로 또 기록을 세울 전망이다.
지난 1~2월은 월 이용객이 2만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6월부터는 매월 2만5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번 달은 19일까지 2만8900명을 기록해 처음으로 월 이용객이 3만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하루 평균 노인 1000명이 더위를 피해 인천공항으로 몰리는 셈이다. 16일 오후 1시쯤 탄 인천공항행 공항철도 안에도 승객 199명 중 34명이 할아버지·할머니였다.
할아버지·할머니 중에선 경로 우대권을 활용해 전철이 연결된 수도권 일대를 방방곡곡 누비는 '활동파'가 많았다. 지정부(77·서울 양천구)씨는 "온양온천에서 목욕하고 경기 동두천 소요산에서 갈비탕에 막걸리도 먹는다"며 "인천공항에선 일본 여행객을 찾아서 왕년에 공부한 일본어로 대화도 한다"고 말했다. 이진우(69·서울 강서구)씨는 "더울 땐 서울 전쟁기념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을 자주 갔었는데 요즘엔 인천공항이 제일 인기"라며 "동네 은행이나 마트로 피서 간다는 건 옛날 얘기"라고 했다.
박기한(81·서울 양천구)씨는 "올여름은 복지관도 너무 덥고 노인들끼리 싸우는 일이 잦아 매일 공항에 나온다"고 말했다. 박씨는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답답했던 가슴이 확 풀리고 나도 외국에 여행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1980년대 의류업체를 운영했다는 김모(77·서울 은평구)씨는 "젊었을 땐 옷을 팔러 미국, 캐나다, 영국으로 참 많이 다녔다"며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면 젊었을 적 생각이 나 혼자 울기도 한다"고 했다. 오효섭(68·서울 강서구)씨는 지난달부터 매일 공항에 나오면서 친구도 2명 사귀었다고 했다.
요즘 인천공항에선 동창회도 열린다. 3층 출국장에선 나들이 옷차림을 한 75세 할아버지·할머니 7명이 벤치에 앉아 초등학교 동창회를 하고 있었다. 손엔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이들은 오후 1시쯤 만나 4층 한식당에서 낙지 돌솥밥과 국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허인순(경기 부천)씨는 "시원한 곳을 찾다가 공항 구경도 할 겸 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할머니들은 보통 점심때쯤 공항에 들러 더위를 피한 뒤 오후 5~6시쯤 일어섰다. 간식으로 옥수수나 과일, 삶은 달걀, 떡, 곶감을 싸오거나 지하 1층 식당에서 김밥(3000~3500원), 비빔밥(5000원) 등을 먹었다. 임모(75·서울 마포구)씨 부부는 "인천공항 식당이 너무 비싸 점심은 집에서 해먹고 나왔다"며 "저녁은 공항철도를 타고 나가 값이 싼 김포공항 푸드코트에서 먹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천공항 한 직원은 "오전 6시 30분쯤 아침잠 없는 노인들이 첫차를 타고 오기도 한다"며 "휴가 피크철에는 인천공항이 매우 혼잡했는데 할아버지·할머니들로 터미널이 더 번잡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