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돌던 노숙자들, 다세대주택 모여 살며 '힐링 반상회'

"반상회 다녀오면 살맛 납니다."

지난 24일 오후 7시 서울 은평구 대조동 한 다세대주택에서 반상회가 열렸다. 노숙자 출신 8명과 고시원을 떠돌던 3명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참석했다. 매달 열리는 이 반상회에는 5회 이상 참석하지 않으면 다세대주택에서 쫓겨난다는 독특한 규칙이 있다. 대화 주제도 다세대주택 관리 문제보다는 '한 달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다. 이들은 반상회 내내 자녀·일자리·저축 문제 등 고민거리를 스스럼없이 털어놨다.

이 다세대주택은 서울시 다시서기종합센터가 노숙자·쪽방촌·고시원 출신 중 자활 의지가 있는 사람을 선발해 최장 10년 계약으로 제공한 임대주택이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박병정(39)씨가 "보름간 지방에 내려가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는데, 땡볕에서 일하다 보니 팔에 땀띠가 심하게 났다"고 하자 다른 주민이 "고생하고 오더니 사람이 확 달라졌다"며 격려했다. 양경철 다시서기종합센터 사회복지사는 "꾸준히 반상회에 참석해 이웃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이 자활 의지가 더 강하다"고 했다.

2009년 서울역 노숙자였던 이재성(39)씨도 '반상회 예찬론자'다. 서울 유명 사립대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던 그는 아버지의 사업 부도, 건강 문제 등이 겹쳐 직장을 그만두고 거리에 나앉았다. 그는 "노숙을 시작할 때는 모든 걸 정리하고 죽을 심정이었지만 다세대주택에 들어와 반상회에서 얘기하면서 친한 친구에게도 못 하던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고시원을 전전하다 2011년 다세대주택에 들어온 조찬희(46)씨는 "세상을 저주하던 내가 요즘은 '세상에 베풀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양경철 사회복지사는 "한때 길거리로 내몰렸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인간관계 회복"이라며 "굳이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서로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이들에겐 살아갈 큰 자극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