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부부싸움 끝에 합의한 두 가지, 黑과 白

1999년 1월, 두 사람은 서울 강남 압구정동 매장 유리창에 옷 한 벌을 내걸었다. 장식 없이 정갈하고 새까만 윗옷, 그 아랜 갓 짜낸 우유처럼 건강한 광택이 감도는 새하얀 치마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름과 레이스로 온몸을 휘감는 과장된 패션이 한참 유행했던 1990년대 말, 옷을 보고 걸음을 멈춘 사람들은 가게 문을 열고 물었다. "이 옷 수입품인가요?"

김석원(43)과 윤원정(43), 이 동갑내기 부부가 만든 디자이너 브랜드 '앤디앤뎁(Andy&Debb)'은 처음부터 승승장구였다. 뉴욕 프랫(Pratt) 인스티튜트 패션디자인학과를 함께 졸업했으며, 외환위기가 막 닥친 1998년 굳이 미국에서 귀국해 브랜드를 처음 시작했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두 사람은 곧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리고 14년째 '앤디앤뎁'은 꾸준히 성장해왔다. 뭐가 더 있을까, 탄탄대로만 달려온 것 같은 두 사람에게. 부부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하게 싸웠는데요. 우리 옷은 그 싸움의 흔적이자 결과예요."

◇'디자인 싸움'의 결과 黑白

서로의 첫인상을 "새침데기 아가씨" "무척 쾌활하고 재밌는 사람"으로 기억하는 두 사람은 유학 시절 자연스레 서로에게 끌렸다. 구혼(求婚)은 "우리 브랜드를 함께 만들어 보자"라는 김석원의 동업 제안(?)이었다. 4학년 졸업 패션쇼를 할 무렵이었다.

뉴욕에서 신혼살림 차린 둘은 각각 패션 회사에 취직했다. 주말이면 함께 여행을 했다. 평탄한 일상.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한국 빨리 가서 브랜드 만들자"는 말이 나왔다. 김석원은 "도전을 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다"고 했다. 마침 한국엔 IMF가 터졌다. 주변에선 말렸지만 굳이 짐을 쌌다. "지금이 아니면 못 갈 것 같아서."

1998년 여름 한국에 도착했다. 스케치를 함께 시작했다.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뜻밖이었어요. 작게는 선(線) 하나, 단추 크기 하나까지 의견이 안 맞았으니까요."(김석원) "남편은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다면, 난 조금 더 로맨틱한 쪽이었다. 난 남편에게 '대체 왜 이렇게 만드느냐'고 매일 물었고, 남편은 '이건 대체 뭐냐'고 대답하는 식이었다."(윤원정) 그렇게 내놓은 옷은 대개 검정과 흰색이었다. 김석원은 "우리의 흑백 옷은 치열한 충돌 끝에 얻은 힘든 합의였다"고 했다.

◇대중과 트렌드 리더 사이

이들이 만든 무심하고 간결한 흑백(黑白) 옷에 가장 먼저 열광한 건 소위 트렌드 리더들이었다. 2000년대 초반엔 '청담동 며느리 옷'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둘은 "그 별명이 우리를 참 오랫동안 곤혹스럽게 했다"고 말했다.

"뉴욕에서 브랜드를 시작하자고 꿈꿨을 때부터 우린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옷을 만들자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강남 일부 사람이 좋아하는 옷'이라는 딱지가 한번 붙으니까 그 편견을 깨기가 쉽지가 않았던 거죠."

고민은 컬렉션으로 풀었다. 2000년부터 서울 컬렉션을 시작했고, 2008년엔 뉴욕 컬렉션 무대에도 섰다. 두 사람은 "이때도 심하게 싸웠다"면서 웃었다. "'네가 고른 검정은 왜 그런 톤이지?' '이 흰색은 왜 이런 광택이 있어야 하지?' 그런 걸로 밤새 싸웠어요. 남들은 아무도 이해 못 할 고민을 우리끼리 했던 거죠."

◇대화한다, 그린다

앤디앤뎁 14년째. 두 사람은 더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우지 않는다. 대신 상대 얘기를 먼저 듣고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2011년 세컨브랜드 '뎁(Debb)'도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었다고 했다. "앤디앤뎁이 어느덧 성숙한 여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어요. '젊고 발랄한 여성을 위한 옷은 어디 갔나'를 두고 논쟁했죠."

김석원과 윤원정은 "언젠간 '앤디앤뎁'을 남성복과 여성복, 향수까지 아우르는 브랜드로 키우고 싶어요"라면서 "그러려면 더 싸워야 할 것 같다"며 웃었다. "우린 어쩌면 평생 앞으로도 선 하나를 놓고 논쟁하고, 컬렉션 조명 하나를 놓고도 맞붙겠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부부고, 그게 디자인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