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엔 뜨내기손님… 마트는 "低價 선물세트만 팔려"

지난 23일 오후 서울 남대문시장은 일반 쇼핑객보다 카메라를 들고 활보하는 중국·일본인 관광객이 더 많아 보였다. "뜨내기손님들이 한두 개씩 살 뿐, 대량 주문은 뚝 끊겼어요." 한 액세서리 도매상은 "명절 특수는 고사하고 먹고살 정도로 장사나 좀 됐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추석이 3주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식료품 상가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건어물 상점 주인 김모(56)씨는 "이곳 상인 중에서 올해 추석 대목을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작년보다 매출이 30~40% 줄었다"고 말했다. 인근 채소가게, 과일가게도 손님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추석 경기가 바닥이다. 장기 불황으로 소비 심리가 얼어붙으면서 '추석 대목'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사라졌다. 기업과 가정에서 모두 빠듯한 주머니 걱정뿐이다. 중소기업들은 추석 선물 준비가 힘겹고, 주부들은 치솟는 장바구니 물가에 한숨을 쉬고 있다.

서울 구로구의 한 대형마트는 지난 16일부터 인근 중소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추석 선물 세트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록 문의 전화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대형마트 법인영업 TF는 선물 세트 판매를 위해 150여개 거래업체와 협의를 진행했지만 20% 정도가 올해 선물 단가를 줄이거나 아예 선물을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답했다.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의 한 IT 업체는 이번 추석에 200여명의 직원에게 줄 선물을 3만원대 멸치 세트로 결정했다. 작년 추석 선물은 5만원대 굴비 세트였다.

소비자들의 빠듯한 살림살이를 반영해서인지 유통업체가 판매하는 추석 선물 세트도 저가형 제품에만 관심이 쏠리고 있다. 26일 이마트가 지난 19일부터 1주일 동안의 추석 선물 예약 판매 실적을 분석한 결과 3만원 이하 선물이 전체 매출의 64%를 차지했다. 특히 1만원 이하의 선물세트 매출은 작년보다 327%가 급증했다. 롯데마트는 지난 2주 동안 예약 판매한 추석 선물세트 매출의 92.4%가 3만원 미만 상품이라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식음료 업계의 추석 선물세트에도 변화가 생겼다. 동서식품은 2만원대 초반의 커피세트를 주력 상품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위축된 경기 탓에 수요가 줄어 전체 선물세트 수량은 작년보다 약 6% 줄였다. CJ제일제당은 2만~3만원대 중저가 세트 물량을 올해 설보다 20% 이상 늘렸다.

온라인쇼핑몰에서는 저렴한 가격의 복고형 선물세트가 인기다. 이베이코리아는 "양말·비누·치약 등 저렴한 생활용품 선물이 인기를 끌고, 1970~80년대에 유행했던 밀가루·과자·라면 선물세트까지 등장했다"고 밝혔다. 서울 동대문 신평화시장에서 양말 도매업을 하는 이하석(63)씨는 "불황에 쩔쩔매는 다른 업종보다 양말은 그나마 경기를 덜 타고 있다"고 말했다.

긴 장마와 폭염 등으로 일부 과일과 채소값이 오르면서 추석 물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조사한 사과 후지(15kg)의 최근 1주일 평균 경매가격은 5만1490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17% 올랐다. 서울 가락시장 관계자는 "열대야로 인해 남쪽 지방에서 사과들이 말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도(캠벨얼리 2kg) 역시 폭염 피해로 1주일 평균 경매가격이 7425원으로 1년 전보다 21% 뛰었다.

채소 가격도 만만치 않다. 배추(10kg)는 최근 일주일 평균 경매가격이 8405원으로 1년 전보다 58% 올랐다. 강원도 홍천 이성호 내면농협 조합장은 "무름병이 돌면서 배춧속이 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와 대파도 오름세다. 추석에 수요가 많은 굴비는 지난해 어획량이 줄어 판매 가격이 20% 정도 오른 상태다. 굴비는 보통 전년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잡은 참조기를 말려서 만들기 때문에 전년도 상황에 따라 시세가 정해진다.

휴가철 반짝 상승했던 한우의 평균 도매가격은 1kg당 1만2931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7% 내려 추석 물가에 큰 부담을 주지 않을 전망이다. 한우 공급량이 워낙 많아 명절 수요에도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유통업계 분석이다. 이마트 이종훈 마케팅팀장은 "지금이 한창 수확 철이라 일부 과일과 채소는 추석 때까지 가격이 다소 내릴 수 있다"며 "다만 태풍 같은 돌발 변수가 생기면 추석 물가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