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8.28 09:32

PEOPLE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오래 공들인 일이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로 돌아올 때도 적지 않다. 아, 내 길은 이 길이 아닌가?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지는 순간이다. 그럴 땐 장인의 삶에서 한 수 배우는 게 좋겠다. 평생 한길만 고집스레 걸어온,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우리 시대의 스승에게.


| 주얼리 장인 |

김종목주얼리 김종목 대표

김종목주얼리 김종목 대표
© 이신영

“값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비싼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누구에게나 자기 것이 최고 아닌가.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보석을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게 마음을 쏟고 정성을 들이다 보면 자연히 세공품의 미려함이 드러난다.”

국내 대표 주얼리 명장 김종목(57) 대표. 그가 업계에 입문한 것은 1974년, 중학교를 갓 졸업한 무렵이다. 강원도 양양 고향에서 상경한 후 신문에서 우연찮게 ‘보석감정과 금 ·은 세공’이라는 광고 글귀를 발견하고 직접 해당 학원을 찾아 감정과 세공기술을 익혔다. “형제들은 모두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는데 나만 유독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볼 때 합격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웃음). 대신 손재주가 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생 때 부러진 양산 대를 가져다가 도장을 새긴 일은 아직도 친구들 입에 오르내리는 얘기다.”

당시 학원비는 12만 원. 소 한 마리 값에 해당한 거금이다. 누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학원비를 치르고 6개월 과정을 수료한 김 대표는 명동의 한 공방에 취업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취업을 하면 바로 세공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현장에서 김 대표의 일이라곤 그저 세공제품의 광택을 내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정도였다. “광을 내는 작업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산화크롬을 쓰는 탓에 온 얼굴이 새파래지곤 했다. 당시 명동에는 물이 안 나오는 건물도 많은 터라…. 어린 나이에 그 모든 게 힘들었다.”

김종목주얼리 김종목 대표의 도구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김 대표는 ‘포기’를 선언한다. 당시 견습생 첫 월급은 2000원. 6년을 꼬박 일해야 학원비를 만회할 수 있는 정도였다. “여러모로 안타까움이 컸다. 한 달은 채우고 그만두자는 생각에 꾹 참았다. 그렇게 꼭 한 달만 다닌다는 것이 평생 직업이 될 줄이야….”

그만두겠다고는 했지만 김 대표는 이미 보석을 다루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다른 견습생들과는 달리 학원에서 몇 개월 기초를 다진 덕분에 퇴근 후면 곧잘 혼자 남아 연습을 하곤 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을 무렵엔 사장이 공방 열쇠를 넘겨주었다. 당시 공방에서 숙직을 하다시피 하며 얻은 위장병은 평생친구가 돼버렸다고.

“광택 내는 일이, 잔심부름을 하며 거래처를 찾아 다니는 일이 얼마나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일인지는 훗날 알게 됐다. 정말 좋은 경험을 쌓은 것이다. 그때 힘들게 찾아 다닌 거래처들이 훗날 내 고객이 됐다.”

김 대표가 명동의 공방에서 독립한 것은 1981년. 그사이 그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휴일도 반납하고 갈고 닦은 실력으로 기능경기대회에 출전, 1979년에는 서울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땄다. 그리고 1981년 미국 조지아 주에서 열린 국제기능올 림픽대회에서 동메달을 따기에 이른다. 이후 공방 사장은 김 대표에게 독립을 제안한다. “나는 과감하게 그 자리에서 독립을 수락했다. 옛말에 ‘주인처럼 일하면 주인이 된다’고 했는데, 내가 그랬다. 주인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이후에도 김 대표의 열정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987년 신설된 ‘명장제도’가 그의 새 목표가 됐다. 명장 기능경기대회를 자신의 세공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대한민국명장에 선발됐다. 대회를 준비하는 10여 년간 기량이 더 는 것은 당연지사.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항상 명장으로서의 의무를 떠올린다. 타인의 귀감은 못 될지언정 절대 손가락질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책임감 말이다.” 이와 관련, 김 대표는 우수 기능 인력 양성을 위해 1997년 MJC보석직업전문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올 7월까지 약 5000명의 귀금속 기능 인력을 배출했다.

김 대표는 지금도 하루를 꼬박 청담동 숍에서 보낸다.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문을 나선다. “습관이 돼서 피곤한 줄을 모른다”는 그는 직원들이 퇴근한 저녁에 주로 디자인이나 연구에 몰두한다. 새로운 기술 습득도 젊은 직원들보다 늘 한발 앞선다. 15년 전부터 이미 ‘3D디자인’ 기술을 익혀 활용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작업이 아닌 컴퓨터 작업이라면 80대 노인이 돼서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디자인과 세공의 전 단계를 지휘하며 “보이지 않는 곳까지 꼼꼼히”를 외치는 그의 완벽주의는 자연히 고객의 발길을 붙들 수밖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또 그 며느리까지 3대째 인연을 맺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돈을 받고 하는 일인데도 되려 잘 만들어줘 고맙다며 케이크를 사 들고 오시곤 하는데, 감사할 따름이다. 그 작은 성의에 큰 보람을 느낀다.”

이쯤 되면 지난 40여 년간 그가 성공적으로 한길을 갈 수 있었던 비결을 알 만하다. “내가 얼마나 숨가쁘게 살아왔는지를 깨달은 것은 불과 1∼2년 전이다. 단지 일이 좋고 재미있어 매달려왔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일의 성공 확률을 따지기 전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이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 맞춤양복 장인 |

봄바니에 장준영 대표

봄바니에 장준영 대표
© 이경민

중구 소공동 일대에 밀집한 비스포크 매장 가운데 단연 손꼽히는 봄바니에 장준영(63) 대표. 전남 순천의 “3대째 빚으로 먹고살 만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살에 상경, 신문배달부터 머슴살이까지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는 장 대표가 양복을 만든 시간은 무려 45년. 1966년 시립삼성직업훈련원 양복과에 입소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옷 만드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도,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숙식을 제공받으며 교육을 받는 것이 좋았다. 당시 내게 그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선택의 여지 자체가 없었던 셈이다.” 남자가 무슨 바느질이냐는 세간의 비난도 그를 멈추게 하진 못했다.

이후 일련의 견습 과정을 거친 장 대표는 1971년 명동의 유명 양복점 코스모스에 재단사로 입사한다. 적성도 재주도 없었던 그는 남들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성장해갔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당시 사회 분위기는 전라도 출신을 병적으로 꺼렸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가 살아 남으려면 옷을 잘 만드는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했다. 옷 만드는 일은 곧 생존이었다.” 사장이 내칠까봐 위장병을 다 앓았다는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철이 들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게 됐다.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그저 ‘잘 맞는 옷’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누구에게도 어울리는 옷. 그것만이 나의 목표였다.”

봄바니에 장준영 대표의 도구
그런 장 대표는 1977년 2월 마침내 코스모스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봄바니에의 전신인 셈이다. 봄바니에가 지금의 롯데호텔 내에 둥지를 튼 것은 1984년. 상호 개명은 2005년의 일이다. 이후 2007년 남산 소월길에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저렴한 맞춤양복 매장 봄바니에뉴욕의 문을 열기도 했다(1992년 론칭한 드레스 ·턱시도 전문 매장 봄바니에웨딩숍도 같은 남산 사옥에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과분하게도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내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인정받았다. 맞춤양복 시장이 예전에 비해 어려운데, 아직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는 데 감사한다.” 그러나 이는 장 대표 특유의 겸손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성실함이야말로 성공 비결이 아닐까. 그가 전한 한 가지 일화. “언젠가 새벽녘에 옷을 맞추러 창고로 오신 분이 있었다. 얼떨결에 치수를 쟀는데, 그날 오후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양복을 꽤나 맞춰 입었는데, 당신 치수 재는 것 보니 믿음이 간다’며 즉시 상품권 80여 장을 주문했다. 회사 창립기념일에 직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고 배현규 한일투자금융회장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집 단골이셨다.”

보통 양복점에 구비한 치수 재는 도구가 3~4가지라면, 봄바니에는 12가지 이상 구비돼 있다. 그 정도로 장 대표는 꼼꼼한 사람이다. 고객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꼽는다는 그는 말한다. “고객의 99%가 내가 만든 옷을 마음에 들어하고 1%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1%의 불만은 개인적 기호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내 잘못이라고, 내가 잘못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 맞는 옷’을 만드는 게 목표라는 장 대표. 그는 좋은 옷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배우고 연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금에 와서 나는 어떤 그림을 남길 것인지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내가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 그림은 다름 아닌 옷이다.” 앞으로 힘이 다할 때까지 옷 만드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장 대표는 조만간 자신의 45년 경험과 노하우를 인터넷에 공개할 계획이다. 더 많은 이들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있기를 그는 소망한다.


| 승마화 장인 |

골든호스 유봉종 사장

골든호스 유봉종 사장
© 김승완

골든호스 유봉종(72) 사장을 빼고 승마화를 이야기할 순 없다. 그는 국내 최초로 승마화를 제작한 인물로, 승마화 제작에 그야말로 평생을 바쳤다. 자그마치 57년 경력이다. 종로구 청운동의 골든호스는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전국 유일의 승마화 제조업체로 유명세를 떨쳤다. 현재 전국의 승마화 제조업체는 약 10곳. 유 사장에게 배운 기술자들이 각지로 뻗어나가 자리를 잡은 결과다.

유 사장이 처음 승마화를 만들게 된 것은 16세 무렵. 서울 명동에 있던 한 양화점의 숙련공으로 일하며 해방 후 정착한 일본인 사장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전쟁 전 어려운 시기였다. 기술을 배워두면 미래가 있을 것 같았다. 남들보다 체구가 작다 보니 앉아서 하는 일이 편하기도 했다.” 양화점에서 26세까지 견습생으로 일한 유 사장은 군대를 다녀온 서른 무렵 독립했고, 이후 10여 년간 ‘고통의 시기’를 보냈다. 승마라는 스포츠가 낯설던 시기였으니 신발이 팔릴 리 만무한 일. “1986년 아시안게임 때까지만 해도 기껏 한 달에 5켤레 정도 주문이 들어왔다. 그러다 1988년 올림픽 때 승마가 대중에게 어느 정도 알려지며 수요가 조금씩 늘어났다.”

판로가 없어 애를 먹던 무렵에도 유 사장은 한눈 한 번 팔지 않았다. “말 못할 어려움이 많았다. 다른 일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그래봐야 실패만 하지 싶어 그냥 그렇게 참고 살았다.” 설움도 적지 않았다. “언젠가 대기업 회장님 한 분이 악수를 청했다. 근데 내 손이 닿자마자 홱 뿌리치는 거다. 손에 굳은살이 너무 많아 놀라셨다며…. 나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물론 당시 그 회장님은 사과의 의미로 재차 유 사장에게 악수를 청하고, ‘보배로운 손’이라 찬사의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옛날엔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손이었다. 늘 구두약이 뒤범벅돼 새카맸으니. 양잿물로나 겨우 지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마저 힘들 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당연히 감내해야 할 몫이라 여겼다.”

골든호스 유봉종 사장의 도구
65세 때까지 재단은 물론, 전국의 승마장과 협회를 돌며 주문과 배달, 수선까지 도맡아 했다는 유 사장. 지금은 3명의 제자와 함께 골든호스를 이끌고 있다. 모두 유 사장과는 20년 정도 인연을 맺어온 이들이다. 더욱이 장녀 유지선 실장이 골든호스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어 든든하다고. 물론, 오랜 파트너인 아내는 오늘날 그를 있게 한 제1순위 조력자다. “1970년 결혼 이후 웬만한 보조 일은 아내가 다 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벌써 45년째다. 어떨 때는 아내가 나보다 잘못된 부분을 더 빨리 찾아낸다(웃음).”

현재 골든호스는 승마화를 포함한 종합승마용품 매장으로 성장, 국내 승마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온라인 유통망까지 구축, 한국마사회와 대한승마협회를 비롯한 전국의 승마클럽에 승마용품을 납품한다. 업계 최초로 아시아와 유럽 등 해외로도 수출하고 있다. “교관이나 국가대표 선수, 유명인이 수없이 거쳐갔다. 지금도 고객의 60%는 선수다. 신발의 ‘질’ 하나는 자부한다. 어디에 내놔도 기술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사업 확장에는 아랑곳 없다. 기량 향상만이 관심 거리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7시면 매장 문을 닫지만, 집에 가서도 기술 연구를 잊지 않는다. 외국 서적을 구해다 새로운 디자인을 공부한다. 유행에 따라 신발 모양은 업그레이드되니까. 멈춰서는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