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전 맡은 赤字 화장품 회사(라미화장품), 뚝심과 오기로 뒤바꿨다

내 나이 벌써 팔순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침이면 콧노래 부르며 출근길에 나선다. 난 아직도 일이 즐겁기만 하다. 돌이켜 보면 고비도 많았다. 고비와 위기를 겪으며 주저앉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에 나섰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나는 1959년 동아제약 공채 1기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경영학도 출신으로 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다. 즐기는 자가 노력하는 자를 이긴다고 했다. 일을 즐기다 보니 반복되는 야근에도 피로를 몰랐다. 회사도 그런 나를 좋게 평가해 남보다 승진이 빨랐다.

1977년 상무였던 나는 동아제약의 골칫거리였던 자회사 라미화장품의 경영자로 발령받았다. 당시 적자 23억원을 안은 부실기업 라미화장품의 사장 자리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지옥문과도 같았다. '호랑이 상무'라 불리며 영업을 지휘하던 내게 부실기업 발령이라니…. 졸지에 집안에서 내친 천덕꾸러기 꼴이 된 것 같아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를 나와 남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한참 분을 삭이고 있는데 눈앞에 서울의 야경이 들어왔다. 작은 불빛 속에 각자의 사연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서울이 보이자 난데없는 뚝심과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시험해 볼 기회로 삼자.' 44세, 내 인생의 2막을 시작했다.

라미화장품에 가보니 만성 적자 기업엔 이유가 있었다. 신통치 않은 제품, 맥빠진 400여 사원, 부실한 거래처 등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손에 아카시아 잎을 쥔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무슨 이야기인지 귀를 기울였더니 잎 떼기로 점심 내기를 하고 있다. 연구원들이었다. "신상품 개발을 하고 있지 않아 바쁘지 않다"고 했다. 위에서 시키는 일도 없고 저희도 할 의욕이 없으니 그런 직원을 꾸짖을 수도 없었다.

바꿔야 했다. 직원들의 의욕을 고취하고 사기를 진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매일 아침 일과 시작 전 한자리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는 일이었다. 전 직원이 다 아는 노래는 애국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음정도 박자도 엉망이었지만 우리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조회가 계속 이어지자 점점 애국가 합창의 음정과 박자가 맞아들어 갔다. 한목소리로 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업이라면 모든 게 가능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발령 후 첫 설이었다. 상여금을 줄 형편이 되지 못했지만 직원들을 빈손으로 집에 보낼 수는 없었다. 마음이라도 표시하고 싶어, 봉투 400여장에 만원씩 넣어 전 직원에게 돌렸다. 영화 관람료가 1000원 정도였으니 아주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컸다. 그런데 인사팀장이 직원들의 상여금 봉투 뭉치를 되가져 오는 게 아닌가. 직원들이 회사를 살리는 데 한 푼이라도 보태고 싶다며 반환했다는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온 봉투를 보며, 함께 회사를 키워 그 열매를 모두가 맛볼 수 있게 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과 함께 제품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한 방'이 필요했다. 시각적 효과를 위해 화장품 패키지(병) 개발을 주문했다. 유럽 출장길에 보았던 여인들의 복식처럼 글래머러스한 곡선의 화장품 병을 만들어오라는 내 주문에 탄생한 것은 언뜻 보면 종 같은 독특한 모양의 병이었다. 종 모양 병에 소리까지 담으면 더 각인되겠다 싶어 광고에 벨소리도 함께 넣었다. 제품명도 '라미벨'로 지었다. 모델도 당시 최고 여배우 유지인을 캐스팅했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제품을 보는 시각의 즐거움과 소리를 통한 청각의 기억 효과, 그리고 모델을 선망하는 여성의 심리까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라미벨의 성공으로 라미화장품은 발령 4년 만에 흑자 전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전 세계의 벨(종)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코리아나 연구소에 세계 각국 종을 진열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흑자 전환과 매출 신장에도 위기는 또 찾아왔다. 당시 6·29 선언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어 노사 분규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라미화장품도 노사 분규를 피하지 못했다. 3박 4일간 협상 끝에 양쪽 모두의 양보로 임금협상을 체결했지만 나는 노사 분규의 책임을 지고 다른 계열사로 또다시 발령을 받았다. 전문경영인의 한계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 발령지는 '동아유리주식회사'였다. 대표이사로 발령이 났으나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야전 사령관처럼 현장을 누비는 스타일이던 내게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것은 그렇게 무료할 수가 없었다. "라미화장품의 평사원이라도 좋으니 현장에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자 등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왔다.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에 몸이 먼저 반응해왔다. 그런 상태로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 젊었다. 더 일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다.

고심 끝에 나만의 사업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결심했다. 그때가 내 나이 쉰다섯이었다. 내 자산은 경험, 지인들과 맺은 인간관계가 전부였다. 어떤 사업을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프랑스인 마셰씨로부터 프랑스의 화장품 브랜드 '이브로셰'가 한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나는 즉시 프랑스로 날아가 이브로셰에 한국의 시장 상황을 브리핑하고 마케팅 플랜을 발표한 끝에 국내의 쟁쟁한 회사들을 물리치고 국내 총대리점 계약을 따냈다. 라미화장품을 운영하며 터득한 노하우와 시장 분석 능력이 이렇게 발휘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자금 부족으로 사무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는데, 계약을 한 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종로에 30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전화기 두 대로 회사를 열었다. 1988년 11월 15일, 코리아나화장품의 시작이었다.

나는 샐러리맨에서 출발해 전문경영인, 다시 창업자로 나의 기업을 일구어냈다. 위기 속에서 어떤 일이든 성공시킬 수 있는 자신감과 자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었고, 사람의 중요함도 절실히 느꼈다. 지금 돌아보니 '위기 속에 기회가 온다'는 말, '기회는 스스로 만든다'는 말이 정말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은]

머드팩 시장 만들고, 채시라를 광고 모델로 공격 마케팅… 화장품 업계 3위로 키워

유상옥(兪相玉·80)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은 화장품 업계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55세라는 적지않은 나이였던 1988년 코리아나화장품을 창업했고, 1990년대 초반에 회사를 화장품 업계 3위권에 올려놨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난 유 회장은 서울 서대문구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문보급소에서 학비를 벌면서 덕수상고에 다녔고, 고려대학교 상대를 졸업했다. 그는 동아제약 공채 1기로 입사해 일하면서도 틈틈이 공부해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고, 고대 대학원 석사와 미국 유니언대학 경영학 박사도 땄다.

그는 방문판매와 공격적 광고 마케팅으로 회사를 키웠다. 회사를 만든 직후부터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탤런트 채시라씨를 광고 모델로 쓰는 모험을 시도했고, 결국은 성공했다. 머드팩이라는 제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도 했다. 코리아나 화장품은 화장품 사업 부문과 피부 관리숍 등을 운영해 작년 매출 977억원, 순이익 113억원을 기록했다. 현재 화장품 제조업계 3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을 지냈고, 1996년에는 수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