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만에 펜을 든다, 이젠 정말 文章을 만들고 싶다

"오정희에 사로잡힌 적 없이 문학을 한다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물은 사람은 문학평론가 이광호(50)였다. 오정희(66)의 작품을 읽었을 그의 청년 시절을 감안한다 해도, 과장과 호들갑에 인색한 이 비평가로서는 예외적 헌사였다. 그만큼 1970~90년대 오정희 문학은 많은 문청(文靑)들에게 하나의 미학적 전범이었다. '불의 강' '유년의 뜰' 등 소설집 단 5권의 과작(寡作)이지만, 삶의 불안과 공포를 직시하는 무서우리만큼 정교한 문장과 사유의 아름다움….

하지만 그는 1998년 단편 '얼굴' 이후 창작을 하지 못했다. 2004년에는 장편 연재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지금의 젊은 독자에게는 교과서에 나오는 작가일 뿐이다. 자주 궁금했다. 왜 쓰지 않는가. 2013년에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유효한가.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문학번역원의 '해외 원어민 번역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한 번역가 7명 중 6명의 발의 및 지지로 '오정희 문학기행'을 떠난다는 기별이었다. 지난 22일 떠난 1박 2일 강원도 화천기행에 동행했다. 작가는 점심 메뉴인 두부전골을 일일이 사발에 덜어줬다.

―작가는 이렇게 자상한데, 작품은 왜 이리 차갑고 무서운가.(김혜정 살라망카 대학 교수·스페인어)

"(웃으며) 그래서 작가와 중국집 주방장은 남 앞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환상이 깨지거든."

―'옛 우물'에 나오는 남자의 간질 발작은 어떤 의미인가.(안데쉬 칼손 런던대 교수·박옥경 부부·스웨덴어)

"작가에게 제일 곤란한 게, 의미를 물을 때다. 내 단편 '중국인 거리'가 교과서에 실린 뒤 수능에 출제된 적이 있다. 지문에 5~6문제가 이어졌다. 재미삼아 풀어봤는데,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했다(웃음). 근사하게 말하면 해석과 의미는 신의 몫일 것이다."

번역자들의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번역된 그의 작품은 13개 언어권 28종. 여성 작가로서는 박경리·박완서·신경숙 등과 함께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다. 간담회가 끝나고 평화의 댐으로 이동하는 길, 대형버스 뒷좌석에 작가와 따로 앉았다.

―안 쓴 지 15년이다.

"글쓰기가 힘들어진 건 더 이전, 80년대 초부터다. 남들보다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부채감이 컸던 시절. (노동문학을 하던 작가들과) 문학적 지향은 달랐지만, 압박감이 컸다. 1984년에 남편(박용수 전 강원대 총장)이 미국에 방문교수로 가게 됐다. 솔직히 기뻤다. 미국에 가면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 언어를 떠나니까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1986년에 귀국했지만, 음풍농월하다가 독재 타도하겠다고 글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밀도에 집착이 낳은 과작(寡作)은 아닐까.

"자신감을 잃었다. 다들 나 보고 힘을 빼라고 충고하는데, 내 생각은 그랬다. 힘을 빼면 '나'다운 특성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의미 없는 말과 문장을 반복할 수는 없지 않나. 남들 쉽게 잘 쓴 작품에는 주눅들면서도, 스스로에게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타협한 거지. 좋은 작품 읽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가."

버스는 구부러진 길을 따라 흔들렸지만, 작가는 흔들리지 않고 싶어했다. 자신의 감정 과잉을 계속 경계했고, 헤어진 다음 날에는 이메일까지 따로 보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오해를 바로잡았다. 새로 보낸 메일에는 '80년대 시대 탓은 가당치도 않다'면서 '재능과 노력과 열정의 부족 때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부채감을 혹 느꼈다고 해도 작가로서의 직무유기에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격으로는 예외적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설에 대한 얘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어떤 이야기인가.

"내 물리적 신체에도 이제 죽음으로 가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 아니겠는가. 요즘 내 관심은 어린이와 노인에게 닿아 있다. 탄생과 죽음에 관한 관심이다. 처음에는 동화처럼 시작했는데, 아이가 읽기에는 어렵겠더라(웃음). 물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몸을 얻고 그 몸의 형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 날지 못하는 새 도도새처럼,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존재의 이야기. 200자 원고지 300장 분량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완성하지 못했던 장편소설도 마무리해야지."

―미완성 계획을 털어놓는 이유는.

"말기적 증상이지. 지금도 자책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부추기려는 가련한 노력이라 혜량해 달라. 나는 평생 부조리, 불합리와 싸우는 것이 문학이라고 배웠다. 그러면서 절대로 초월·초탈한 도인은 되지 말자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동안은 좋은 작품 읽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나를 달래왔는데, 이제는 정말 문장을 만들고 싶다. 대단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그것 자체만이 목적인 문장을 만들고 싶다."

문학기행 전날, 작가는 춘천집의 축대 공사를 마침내 완성했다. 이번 여름, 이 지역에 유난히 가혹했던 폭우와 산사태로 작가의 집 한쪽에 지은 18평 작업실 바로 앞까지 토사(土砂)가 들이닥쳤다. 무섭다는 작가의 푸념에 남편은 그냥 안채에 들어와 글을 쓰라고 했고, 몇 번의 설득과 거부가 오간 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 집을, 나가겠어. 내 남은 인생을 (텃밭에서 딴) 토마토나 삶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결혼 39년 만의 첫 항거였다. 그렇게 지은 축대요, 지켜낸 작업실이다. 이제 이 작가에게는 더 이상의 핑계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