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서 발빼는 외국인, 한국 株式·債券은 산다

미국의 양적 완화(채권을 사들여 돈을 푸는 것) 축소 조짐에 따라, 많은 신흥국이 금융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주식과 채권에 대한 외국인들의 '바이 코리아'(Buy Korea) 행진이 계속 되고 있다. 투자 전문가들은 "외국인들이 경제 성적표가 뛰어난 한국과 다른 신흥 국가들을 차별화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하면서, 이런 차별화 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주식·채권 사들이는 외국인

금융감독원과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지난 1일부터 26일까지 유가증권시장에서 총 7029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올 상반기(1~6월) 외국인들은 한국 주식을 10조원가량 팔아치웠고 이에 따라 코스피 지수 1800선이 붕괴되기도 했었다. 미국 펀드 뱅가드가 한국을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분류하기 시작하면서 자동적으로 9조원 가량을 매도한 '뱅가드 물량'의 영향이 컸다. 그러던 외국인들은 지난달부터 1조2950억원 순매수에 나서면서 한국 주식을 쓸어담고 있다.

외국인들은 7~8월 코스닥 시장에서도 3200억원을 매수하면서 '사자'로 돌아섰다. 미국(1조3000억원 순매수), 싱가포르(9440억원), 캐나다(3390억원), 네덜란드(1990억원) 등이 한국 증시의 '큰손'으로 나서고 있다.

반면 외국인들은 이달 들어 신흥국들의 '9월 위기설(說)'이 확산되자 태국 증시에서 11억달러(약 1조2000억원), 인도네시아에서 4억2000만달러(약 4700억원)를 빼내갔다. 인도 증시에서도 2억8000만달러(약 3200억원)를 뺐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미국이 양적 완화를 중단할 것'이라는 시그널이 나올 때마다 미국 채권 매입을 위해 신흥국 채권을 처분하고 있지만, 원화 표시 채권은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 외국인들은 올 들어 국채와 통화안정채권을 중심으로 6월에 보유 채권 물량을 100조원대로 키웠고, 7월에 1조7000억원, 8월에 1조6000억원어치를 추가로 사들였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운용사인 핌코와 매뉴라이프 에셋매니지먼트, 슈로더 인베스트먼트 등 '글로벌 큰손'들이 한국 채권을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지난 6~8월에 글로벌 투자자들이 신흥시장 채권형 펀드에서 202억달러(약 22조원)의 돈을 뺀 것과는 정반대의 자금 흐름이다.

◇외국인들, 한국 장기 성장 전망에 베팅

이 같은 '한국 차별화' 현상은 경상수지 적자와 통화 약세에 시달리는 다른 신흥국과 달리 한국이 17개월째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탄탄한 지표를 보여주는 것과 관련이 깊다. 28조원대의 원화 채권을 보유한 프랭클린템플턴 투신운용의 김동일 채권대표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더블에이 마이너스(AA-)로 높은 신용등급을 유지하면서 탄탄한 성장을 보이는 매력적인 나라는 많지 않다"며 "외국인들이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차 등 세계적인 기업을 보유한 한국을 '신흥국'이라기보다는 '투자 선진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들은 최근 한 달 동안 화학·디스플레이·자동차부품·기계 업종에서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디스플레이·자동차 부품 등은 경기가 반등할 때 가장 먼저 수혜를 입는 업종으로, 외국인들이 한국의 성장 전망에 '베팅'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삼성증권 오현석 투자전략 담당 이사는 "미국과 유럽 경기가 호전되면 한국 수출 기업들이 수혜를 입을 것이란 전망도 외국인의 투자 판단에 작용하고 있다"며 "그동안 외국인들이 '한국을 무시해도 수익을 올릴 곳이 널렸다'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을 제외하면 투자 성과에 문제가 생긴다'는 쪽으로 바뀌는 것 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장기 성장 전망에 투자하는 점을 들어 한국과 아시아 신흥국의 차별화가 하반기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만 "인도 등 아시아 국가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해 외국인들이 '신흥국 전체에서 돈을 빼자'고 나온다면 한국도 피해를 볼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