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총장 헌화로 106년 전 이준 열사 恨 풀렸겠죠"

28일(현지 시각) 네덜란드 헤이그 중심가에서 4㎞ 떨어진 한 공동묘지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부인 유순택 여사와 함께 들어섰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왔지만,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는 참석도 못한 채 숨진 이준 열사가 56년간 묻혔던 곳이다. 열사의 유해는 1963년 한국으로 옮겨졌고, 한국과 네덜란드 정부가 무덤이 있던 자리를 유적지로 조성했다.

반 총장은 이날 국제사법재판소가 자리 잡은 평화궁(Peace Palace)의 건립 100주년 기념식 참석차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했다. 분(分)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반 총장은 이준 열사 묘적지에서 20분간 머물며 헌화했다. 반 총장이 이준 열사 묘적지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이 자리에 초청받은 이기항(77)·송창주(74) 부부는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씨는 본지 전화 통화에서 "반 총장께서 '외교관으로 출장차 헤이그에 여러 번 왔지만 이곳에 한 번도 와보지 못하고 이제야 왔다. 너무 늦게 왔지만, 오래전부터 오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씨는 "이준 열사는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려다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오늘 유엔 최고 책임자의 방문으로 100여년 만에 한(恨)을 푸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교민들과 함께 묘적지에 유엔기와 태극기를 걸었다. 흰색·분홍색 꽃도 바쳤다. 106년 전 같은 자리에서 열린 이준 열사 장례식 때 놓였다는 꽃과 같은 색이다.

이씨 부부는 헤이그에서 18년째 이준 열사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1972년 네덜란드에 정착해 한국 옷을 수입해 파는 일을 했던 이씨는 1991년 교민들과 함께 이준 열사 추모식을 열었다.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위해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추모식을 계기로 네덜란드 언론이 이준 열사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열사가 돌아가신 건물이 방치돼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암스테르담에서 차를 몰고 도착해 보니 3층 건물이 낡아서 엉망이었습니다. 재개발된다는 이야기도 그때 알았고요."

이씨 부부는 헤이그 시청에 건물을 한국 역사 유적지로 보존해 달라는 청원을 내고 사재 20만달러로 건물을 사들여 1995년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부부는 그때부터 집이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매일 왕복 3시간 전철을 타고 기념관으로 출퇴근해 왔다. 처음에는 기념관과 사업을 병행했지만 몇해 지나지 않아 사업을 정리했다.

한 달 평균 300여명이 기념관을 찾는다. 이씨는 "조금씩 알려지면서 방문객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매년 한국 정치인들도 왔는데 올해는 국회가 바쁜지 한 분도 안 왔다"고 말했다. 일본인 관람객도 간혹 있다. 이씨는 "일본의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는 일본인도 있다"며 "일본에 양심 세력이 적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 부부는 이준 열사와 한국 역사에 대해 강연을 하는 '이준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이씨는 "이준 열사와 한국 역사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유럽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