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만 살게요… 고급 느낌 나니까

은행원 김희원(38)씨는 자신을 가리켜 "로케팅족"이라고 부른다. 로케팅(rocketing)이란 대부분의 생필품은 값싼 물건으로 골라 사지만, 한두 개 물품엔 아낌없이 돈을 쓰는 소비 행태를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김씨는 점심은 대개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지만, 향수와 향초만큼은 하나에 40만원이 넘는 고급 제품을 고집한다. 침구도 영국 존 루이스 백화점에서 수입했다는 50만~60만원짜리 제품을 골라 사들인다. 김씨는 "집에서 쉴 때만큼은 풍족하고 안락한 기분을 누리고 싶다"고 했다.

5~6년 전부터 시작된 이른바 '작은 사치' 열풍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저성장·불황의 나날을 견디기 위해 요즘 사람들은 안 입고 안 써서 모은 돈을 한두 품목엔 아낌없이 지불하며 잠시 스트레스를 잊는다. 그렇다고 자동차나 집처럼 큰 품목에 돈을 쓰진 못한다. 대신 향수·책·침구·매니큐어·차(茶)처럼 소소한 부분에 제법 큰돈을 내면서 찰나의 호사(豪奢)를 만끽하는 것. 업계에선 이 같은 심리를 이용해, 고급 맞춤복(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을 입진 못하지만, 이를 몸에 걸친 듯한 기분이 들도록 한다는 소위 '드미 쿠튀르(Demi Couture)' 제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불황 속 호사… 드미 쿠튀르

요즘 화장품 업계는 울상이다. 하지만 한 개에 최소 10만원이 넘는 고가(高價)의 향수만큼은 예외다. 갤러리아 백화점에 따르면, 이 백화점 전체 화장품 매출 신장은 작년보다 8% 오르는 데 그쳤지만, 고가 향수의 매출은 39%나 치솟았다. 신세계 백화점 역시 향수 매출은 78%나 성장했고, 아예 고급 향수만 따로 모은 단독 매장을 낸 지점은 매출이 143%나 올랐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가 향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코스메틱은 작년 연말에 '아르마니 프리베'라는 향수를 내놨다. 아르마니의 맞춤복 의상은 수천만원씩 하니 쉽게 살 수가 없지만, 이 향수는 30만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아르마니 프리베' 홍보팀은 "쿠튀르의 느낌을 몸에 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미 쿠튀르'의 일종이다"고 했다. 이 회사는 고객들이 다양한 향수의 냄새를 맡아볼 수 있도록 백화점 명품관에 '퍼퓸 바'도 꾸며놓았다. 값비싼 양복으로 유명한 '에르메네질도 제냐'도 쿠튀르 컬렉션 의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에센제'를 내놨다. 한 병에 30만원이 넘지만 반응은 좋다. "향기만으로도 제냐의 최고급 양복을 입은 느낌을 낼 수 있다는 점에 고객들이 무척 좋아한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책 한 권 100만원, 차 한 잔 6만원

책도 새로운 '드미 쿠튀르'의 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 강남 신사동 도산공원 인근과 갤러리아 백화점에 들어선 예술 서적 카페 '애슐린(Assouline)'은 초호화 장정의 예술 서적, 샴페인과 커피를 파는 곳이다. 30~40대 남성이 특히 많이 찾는다. 20세기 유명 자동차를 소개하는 '자동차(Cars)'라는 책이 가장 많이 팔렸는데, 이 책 한 권 값은 118만원이다.

커피에 이어 최근엔 블렌딩 티도 '드미 쿠튀르'의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신세계백화점이 운영하는 식품 매장 '딘앤델루카'에서 최근 가장 매출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항목은 프랑스 산(産) 블렌딩 차다. 작년 대비 매출이 30%가량 성장했다고 한다. 'TWG' 같은 브랜드의 제품은 100g에 6만원 정도 하지만, 가장 잘 팔리는 제품 중 하나로 꼽힌다. 라이프 스타일 컨설턴트 구선주씨는 "소비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대다. 잠시나마 모든 걸 내려놓고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드미 쿠튀르 상품의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