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人] 주부들의 '구용필'… "지금도 제일 잘나가!"

한때 그녀는 '구용필'이라 불렸다. '주부들의 조용필, 구지윤!'이란 뜻이다. 그만큼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내가 없으면 백화점이 개장을 못 했어요. 개점 이벤트는 구지윤이 해야 했거든." 부산까지 비행기 타고 가고, 차 안에서 떡 한 쪽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우리나라에 없던 직업 '노래 강사'로 문화센터 노래 교실에 뛰어든 지 올해로 30년째. 국내 '노래 강사 1호' 구지윤(69·여성문화원 원장)씨는 요즘도 "내가 제일 잘나가!"를 당당히 외친다. 예나 지금이나 자타 공인 주부들의 조용필이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서 강좌를 막 끝내고 나온 구씨는 생기발랄했다. 일흔이란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선명하게 파란 미니 원피스에 새빨갛게 칠한 립스틱과 매니큐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이힐을 신은 몸매는 날씬했다. "지금도 1주일에 꼬박 닷새(월~금)를 용산에서 잠실, 천호동에서 신촌, 압구정동에서 목동으로 뛰며 각 백화점과 문화센터 노래 교실을 채우고 흔든다"고 했다.

"어제(지난 20일)는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구지윤 칠순과 노래 인생 서른해를 축하하는 기념 잔치까지 열었어요. 세 아이 입학식·졸업식도 한 번 못 가봤을 만큼 30년간 죽 쉬는 날이 없었어요.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불러주면 감사하며 달려가죠. 어머니들, 할머니들한테 나는 교주(敎主)거든요, 교주!"

구씨는 '노래 교실의 산 역사'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법학도가 되고 싶었고,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도 받았지만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수도여자사범대학(지금의 세종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자신의 미래가 '이상한' 곳으로 열리고 있다고 생각한 때가 그 무렵이었다. 노래와 춤이 즐겁고 좋았다.

졸업 후 바로 결혼해 10여년간 가사에 전념하다가 큰딸 초등학교에서 어머니 합창반 지도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룹으로 레슨을 받겠다는 주부들이 그녀의 집으로 찾아들면서 입소문이 났다. 1983년 동아문화센터에 정식 강사로 초빙돼 노래 교실을 처음 열었다. 40대 중반에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한 셈이다.

"선천적으로 '딴따라' 기질이 있었어요.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동네에 온 농악대를 온종일 따라다녔고, 밥상에 앉아 밥뚜껑과 젓가락으로 꽹과리 치듯 장단을 맞추다가 혼난 적도 있거든요."

당시 주부 대상 강좌는 서예, 꽃꽂이, 문예창작이 다수였다. 그녀는 "처음엔 나도 다도(茶道)처럼 있어 보이는 걸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근데 그거 고정관념이에요. 내 속을 제일 먼저 알아주는 게 노랫말 한 구절이더라고. 힘들 때나 기쁠 때 나한테 딱 맞는 노래 한 소절 부르면 가슴이 뻥 뚫려요."

구지윤의 노래 교실에서 그녀와 회원들은 노래도 부르지만 남편 흉도 속시원히 본다. 말 시키면 귀찮아하는 아이들에 대한 서운함도,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왜 열었나?' 생각하게 되는 나이 듦의 허무함도 토로한다. "내가 보기엔 팔자 좋아 보이는 부잣집 마나님들이 나랑 노래 부른 뒤 내 손을 꼭 잡으면서 펑펑 울어요. 다음 날 심장 수술 받을 사람이 죽으면 죽고 살면 살 거란 심정으로 나와서 실컷 노래 부르고는 그다음 날 가슴이 뻥 뚫렸다고 펄쩍펄쩍 뛴 적도 있지요."

그녀는 지금도 강좌를 열기만 하면 최소 100명은 거뜬히 모은다. 30년 세월을 어떻게 최고 자리에서 요지부동이냐고 물었더니 "'평범'이 오늘날 내가 있는 이유"라고 답했다. "학벌이 그리 좋지도 않고, 큰 부잣집 딸도 아니고, 경상도 사투리(부산 출신)도 슬쩍 나오니까 엄마들이 '나도 저 정도는 될 것 같은데' 하면서 동질감을 가져요. 나는 나를 알아. 노래는 좀 불러도 최고 성악가는 아니죠. 다 갖추면 다가가기 부담스러워요. 재수 없기도 하고."

그녀는 "살아봐. 젊을 땐 하늘의 별도 달도 다 내 것 같지? 나이 들면 못다 이룬 꿈에 대한 허탈감 때문에 황혼의 고독감을 느낀다"고 했다. "내 뜻대로 풀린 사람 몇이나 되겠어요.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많고, 나이 칠십이면 고려장이에요. 고개 숙일 줄 알아야 해. 근데 나도 50대까진 엄마들 아픈 걸 이해 못 했는데 육십 넘어가니 와 닿아요. 엄마들 얼굴이 왜 찌그러지는지 이제야 안 거예요."

최근 뜻깊은 일이 생겼다. 그녀가 초대 회장을 맡았던 한국가요강사협회(회장 박상훈)가 오는 10월 14일을 '노래 강사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10월 14일은 30년 전 그녀가 주부들 앞에서 처음으로 강좌를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동네마다 노래 교실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여자들이 한가하게 노래나 부른다며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어요. 근데 그날을 기점으로 전국의 노래 강사 수천명이 밥을 먹고 살게 됐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줬으니까 기념일을 정해 노래 강사가 된 보람을 공유해도 되지 않겠어요?"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음 날 오전 어김없이 다시 시작된 구지윤의 노래 교실. 주부 회원들은 손뼉 치고 발을 구르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내 강좌엔 아흔을 넘긴 분도 있고, 여든을 넘긴 분은 수백명에 달한다. 하루라도 더 사는 걸로 충분하지 않나. 뭐든지 좋게좋게,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받아들이면서. 그 마음가짐이 나한텐 보약"이라며 목청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