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후 5년] 독일만 괜찮을 뿐… 유럽의 돼지들(PIIGS 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공짜복지에 속고 긴축에 울다

지난 1일부터 그리스의 수퍼마켓에서는 다른 나라에선 찾아 보기 힘든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유(乳)제품을 제외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의 연장판매를 허가한 것이다. 소매상들은 이날을 기해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등 식품을 종전의 3분의 1 가격에 팔고 있다. 그리스 소비자 단체들과 긴축에 반대하는 극우파 정치인들은 일제히 "돼지에게나 먹일 음식을 국민에게 팔고 있다"며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현지 언론은 긴축재정으로 연금이 깎이고 세금 부담이 늘어난 서민들이 유통기한 지난 식품이라도 앞다퉈 사가고 있다고 전했다.

5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이 그리스에 2400억유로의 구제금융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그리스 경제는 20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고,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2012년 기준 158.9%)도 여전히 높다. 장기 불황으로 빚 상환 능력이 떨어지면서 그리스를 살리려면 "새 프로그램이 필요하다"(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진단까지 나오고 있다. 아일랜드,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등 비슷한 시기에 구제금융을 받았던 재정위기 국가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유로존 전체의 경기 지표는 바닥을 찍고 호전되는 듯한 모습이지만, 이는 유로존 최대 경제 대국 독일의 선전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거덜난 나라 살림

5년 전 미국 부동산 거품 붕괴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유럽 재정위기로 전이됐다. 유럽계 은행들이 미국 주택 관련 파생상품 투자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 부도 위기에 몰리자 각국 정부는 구제금융 자금을 투입해 은행을 살렸다. 이 과정에서 국가 부채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됐고,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이 순차적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등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은행의 위기가 국가 위기로 전이된 셈이다. 이들 나라는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실행했다. 하지만 긴축은 소비·투자 위축을 불러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수십 년간 다양한 복지 혜택에 익숙해져 있던 유럽 재정위기국 국민들은 복지 축소와 증세에 반발하며 '정권 교체'에 나섰다. 이에 따라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잇따라 정권이 바뀌었지만, 새 정부도 나라 살림이 거덜난 상황에서 '긴축 정책'이란 큰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커져가는 남북 격차

지난달 14일 발표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에 비해 0.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년 반 만에 나타난 플러스 성장 신호에 유로존 경제가 마침내 바닥을 찍었다는 전망이 나왔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남북 간의 격차만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성장률 증가폭 0.3%포인트 중 독일과 프랑스의 기여도가 각각 0.2%포인트, 0.1%포인트이고 나머지 유로존 회원국들은 제자리걸음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로존 3~4위 경제 대국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올 2분기 중에도 마이너스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머지 재정위기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아일랜드의 경우 2010년 '트로이카(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로부터 675억유로의 구제금융을 받고 회복하는 듯했으나, 올해 2분기까지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더블딥(경기가 반짝 상승하다 다시 침체에 빠지는 현상)에 빠졌다. IMF는 올해 유로존 경제성장률을 -0.6%로 전망하며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IMF의 전망에 따르면, 유로존 경제는 2014년부터 회복세로 돌아서 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성장률 전망치가 0.9%에 그쳐 12%(8월 말 기준)에 이르는 실업률을 낮추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갈 길 먼 재정통합

유로존 재정위기가 터진 후 회원국 사이의 갈등은 더 심해진 양상이다. 남북 유럽 모두에서 유럽 통합 회의론(Euroscepticism)이 고개를 들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여론조사 기관인 유로바로미터의 최근 설문에 따르면 유럽인들 사이에 "EU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독일에서 59%, 프랑스 56%, 스페인 72%로 조사됐다. 2007년엔 각각 36%, 41%, 23% 수준이었다.

재정통합이 안 된 상태에서 유럽중앙은행이 돈을 뿌려 급한 불은 껐지만, 재정위기 국가들에서 저성장-고실업 상태가 지속되면 유로존의 지속 가능성이 의심되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시장의 신뢰를 얻으려면 유로존의 재정통합이 필요하지만, 재정이 튼튼한 독일 등 북부권 회원국과 남유럽 회원국 간 이견이 커서 단기간에 재정통합의 실현 가능성은 낮다.

독일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WZB)의 소니아알론소연구원은 "2009년 이후 남유럽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가 30% 이하까지 떨어져 70%를 웃도는 북유럽과 40%포인트 이상 차이가 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남북 유럽 간 '이념적 별거 상태'가 길어질수록 재정통합은 어려워진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