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도자기'가 싫어 도망쳤지만 '아버지의 한 우물 정신'이 나를 만들었다

나는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5세 때부터 일본에서 도자기를 만들어온 도예가였다. 한번 도자기를 굽기 시작하면 1주일 정도 집에 안 들어오시는 건 예사였다. 이글거리는 가마와 피 말리는 씨름을 하셨다. 그렇게 수백 시간 동안 공들여 구운 도자기를 또한 주저 없이 망치로 깨부수는 장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목숨같이 여기던 도자기를 가업(家業)으로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형들은 설득이 되지 않았다. 애꿎게 가업 승계자로 지목된 것은 나였다. 형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도자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나에게 "넌 중학교만 졸업하면 된다"며 아예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하셨다.

내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형들이 "최소한 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간곡하게 설득한 끝에 아버지는 내가 요업(窯業)과가 있는 공고에 진학하는 것을 조건으로 허락하셨다. 그러나 나는 서울공고 요업과에 진학하는 걸로 말씀드리고, 실제로는 용산공고 기계과에 원서를 내 합격했다. 용케 1년을 버텼지만 결국 탄로가 나고 말았다. 뒤늦게 사실을 안 아버지는 "당장 고향으로 내려오라"며 노발대발하셨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가마 앞에서 며칠씩 하염없이 불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도자기가 구워지는 모습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자니 어떤 도자기가 잘 구워지고 있는지, 어떤 도자기가 흠을 가지고 있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몰입을 하니 제품의 완성도가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처음으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가마 앞에서 지내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1년을 휴학하고 큰누나 하숙집에 묵고 있던 어느 날, 하숙집 주인이 자기 일 좀 도와달라고 제안했다. 하숙집 주인어른은 성균관대 기계공학과 양원호 교수님이었다. 내 인생에 설계라는 영역과 인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교수님 연구실에서 사환 일도 하고 조교들 도우미 역할도 해가면서, 시간 날 때마다 청강도 했다. 교수님으로부터 설계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도 듣고, 기계의 동작 원리, 설계에 대한 개념도 배웠다. 이를 응용해 움직이는 제품을 만드는 일이 신기하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내 성격과도 딱 맞았다.

1년 가까이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용산공고 기계과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 9월 당시 한국의 전자산업을 이끌고 있던 금성사(현 LG전자)에 고교 우수 장학생으로 설계전문 과정에 입사했다. 당시 LG전자 가전공장은 부산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LG전자가 집에서 멀었다는 점도 선택을 한 요인이었다. 도자기로부터 멀리 도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금성사에서 제일 잘나가는 분야는 선풍기나 밥솥이었다. 하지만 부산과 경남 지역 공고 출신들이 이미 모두 차지하고 남은 자리가 없었다. 남은 곳은 당시 막 태동하던 세탁기와 에어컨이었다. 나는 '의식주'와 직접 관련된 제품인 세탁기야말로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세탁기와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1989년 뼈아픈 노사분규를 거친 LG전자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부동의 일등을 놓치지 않던 사업들이 반 토막 나기 시작했다. 세탁기 사업도 시장점유율이 60%대에서 38%까지 떨어졌다. 당시 내게 주어진 과제가 '1등 탈환 태스크포스'의 리더였다. 제품 개발과 의사 결정을 위한 모든 권한이 주어졌다. '고객의 관점에서 전혀 다른 세탁기를 개발해보자'는 생각으로 전체 팀원이 의기투합했다. 세탁 용량, 기술 방식, 디자인은 물론 프로그램까지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인공지능 세탁기'를 내놨다. 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적자였던 사업이 흑자로 돌아섰다. 제품 하나가 사업 전체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체험했다.

당시 세탁기는 일본에 대한 기술 의존도가 높았다. 세탁기연구실장을 맡으며 '탈(脫)일본'을 결심했다. 어릴 때 도자기 관련 서적을 읽어야 했기에 아버지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그 덕분에 일본어로 된 기술 자료와 책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일본의 관련 기술 서적을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해서 읽었다.

세탁기의 기본 구조는 세탁통과 모터를 벨트로 연결해, 클러치라는 기구로 세탁과 탈수를 번갈아 조정하는 방식이었다. 세탁통과 모터를 벨트와 풀리라는 두 단계를 거쳐서 연결해 세탁통을 돌리다 보니 제품 결함도 자주 일어나고 소음이 크며, 자유로운 속도 조정이 어렵고, 세탁기 용량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본, 아니 세계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아예 세탁통에 모터를 직접 부착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개발팀과 공장 2층에 침대와 주방시설을 마련해 놓고 밤샘 작업을 했다. 결국 성공했다. 그렇게 개발한 기술이 DD(Direct Drive) 모터다. "개발한 사람이 나와서 광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광고에도 출연했다. 초기 월 200대 정도 팔리던 제품이 1년 만에 2만대 수준으로 올라섰다. 판매가 100배 늘어난 것이다. 이 제품은 LG세탁기가 일본 업체를 제치고 '글로벌 1등'으로 올라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세탁기라는 한 우물을 파고든 것은 일등에 대한 도전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도전하고, 실패했다. 그런 과정 끝에 결국 LG세탁기가 독자 기술로 세계시장에서 1등을 달성했다. 그 기쁨은 실패를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엔지니어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하는 이유다.

나는 세탁기에 파묻혀 살다가 최근엔 냉장고·청소기·오븐에도 재미를 느낀다. 그것들을 직접 분해하고, 조립하고, 생산라인을 돌아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나는 도자기 장인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애썼지만, 요즘 아버지의 피가 내 속에 흐르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나는 도자기로부터는 도피했지만, '가전'에서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찾았다. 그래서 후배들이 나를 '한 우물을 판 장인(匠人)'으로 부른다면 큰 영광이겠다.


조성진 사장은… 1분에 3대 팔린 세탁기 개발, LG전자 최초 고졸 출신 사장

지난해 말 사장으로 승진한 LG전자 조성진(57) 사장은 1958년 회사 설립 이후 최초의 고졸 사장이다. 삼성전자에도 고졸 사장은 없다.

조 사장은 세탁기 전문가로 유명하다. 충청남도 대천 출신인 그는 1976년 사원으로 입사해 세탁기 부서에 배치받았고, 1990년대 초 세탁기 연구실장을 지냈다. 부사장 때 직함도 세탁기 사업부장이었다. LG전자 세탁기를 세계 1위에 올린 주역으로 꼽힌다. 그가 개발을 주도한 DD(Direct Drive·세탁통과 모터를 직접 연결하는 방법) 기술로 만든 ‘6모션 세탁기’는 2009년 10월 출시 이후 지난달까지 전 세계에서 800만대 넘게 팔렸다. 4년 9개월간 1분에 3대씩 팔린 셈이다. 그가 사장이 되기 전까지 세탁기라는 한 우물을 판 기간이 무려 36년이다.

그는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HA(가전)사업본부장을 맡았다. 청소기뿐 아니라 냉장고, 오븐, 청소기 등 가전제품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박람회(CES)에서 “2015년까지 LG전자 가전을 세계 1등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