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우리는 모두 잘 있다(All well here)"… 이 한마디

최근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1914~ 1918)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편지 23만 통을 인터넷에 올렸다. 전장에서 가족이나 연인에게 썼다가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어두운 자료보관소에서 긴 세월 숨죽인 채 누군가에게 전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편지를 쓴 군인이나 가족들 모두 100년이 지나는 사이에 고인(故人)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세기의 세월이 흐르도록 편지를 보관해오다가 공개한 영국 정부 덕택에 이 편지들은 역사적 유물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됐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힌 한 영국 군인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2차 대전 때 우리나라 인천에 영국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천의 한 박물관에서 당시 수용소로 배달된 엽서를 입수했는데 내게 개인적으로 검증을 요청해온 것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2월 2일 영국 북쪽 스코틀랜드 동부의 주도(州都)인 앵거스(Angus)에서 마거릿 브라운(Mrs. M. Y. Brown)이라는 여성이 영국군 중위 도널드 배리(Alexander D. Barrie)에게 보낸 엽서였다.

"1943년 6월 4일에 보낸 너의(또는 당신) 편지 잘 받았다. 우리는 모두 잘 있다."

엽서의 내용은 이 짧은 두 문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행간에는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 있을 것이다. 아래쪽에 '검열제(檢閱濟)'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것을 보면 일본군이 내용을 검열한 뒤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수취 날짜는 연필로 1944년 7월 21일이라고 적혀 있다.

편지 내왕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맨 먼저 배리 중위가 1943년 6월 4일에 편지를 보냈고, 브라운이라는 여성은 6개월 뒤인 12월 2일에 답장을 썼다. 그리고 다시 7개월 뒤 배리 중위는 인천의 포로수용소에서 엽서를 받았다. 검열을 거치고 국제적십자사의 중개를 통해 적국의 포로수용소까지 편지를 보내자니 이처럼 긴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로가 된 군인과 본국의 가족에게 '잘 있다'는 이 단 한마디 안부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인가.

나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궁금한 사항을 이메일로 문의했다. 배리 중위는 어떤 인물인가, 출생연도, 출생지, 편지를 보낸 여성은 누구인가, 그는 살아서 영국으로 돌아갔나 등이었다. 영국 문서보관소는 유족과 직계 후손이 아닌 한 군인의 신상을 알려줄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이베이에 배리 중위의 아버지(Alexander Y. Barrie)가 보낸 엽서가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2차 대전 기념물을 수집하는 소장가들이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1944년 6월 25일자 소인이 찍힌 엽서는 배리 중위의 편지를 8차례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연필로 11월 17일에 읽었다고 표시돼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9개월 전이었다.

포로가 되었던 영국군의 수기(手記)에 의하면 영국 포로들은 1942년 8월 18일 싱가포르에서 출항하여 29일 대만에 정박했다가 9월 15일 부산에 도착했다. 서울을 거쳐 인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인원은 535명이었다. 1944년 10월 10일에는 장교를 제외한 사병은 모두 일본으로 이송되어 광산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장교였던 배리 중위는 아마도 종전까지 인천에 수용되어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일본 시코쿠의 도쿠시마현(德島縣) 나루토(鳴門)시에는 '도이쓰('獨逸·독일'의 일본식 표기)기념관'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은 중국의 산둥반도에 있던 독일 조차지(租借地) 칭다오(靑島) 주둔 독일군 약 5000명을 포로로 잡아 일본 내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했다. 그 중 하나가 나루토에 있었다. 1972년에 건립된 도이쓰기념관에는 1917년부터 전쟁이 끝난 뒤인 1920년까지 수용되어 있던 독일군 포로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본국에서 포로들에게 보낸 물건과 포로들이 사용하던 유품들이다. 그중에는 본국인 독일에서 보내온 악기도 있다. 포로들은 당시 이 악기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베토벤 심포니 9번을 연주했다고 한다.

나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과 북한의 이산가족들은 헤어진 가족들의 생존 소식조차 모른 채 60여년을 보냈다. 1·2차 대전 때 전쟁 포로보다 못한 처지다. 통일부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12만 명이 넘고 이 중 5만5000여명은 이미 사망했다. 생존한 7만3000여명 중에도 70세 이상 고령자 비율이 80%를 넘는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북한이 편지 왕래를 허용한다면 이들은 그동안의 한(恨)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찔끔찔끔 이어지는 100명 단위의 이벤트성 이산가족 상봉보다 편지 내왕을 먼저 실현해야 한다. 그래야 생사(生死)라도 확인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산가족들의 바람도 포로였던 배리 중위나 본국의 가족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잘 있다" 이 짧은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다. 영국과 일본, 독일과 일본이 세계대전 중에 한 일을 우리는 아직도 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