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9.05 04:00 | 수정 : 2013.09.05 09:34

[주말매거진] 가을의 문턱… 가볼 만한 여행지

 

무더위가 한풀 꺾이더니 어느덧 추석 연휴가 코앞이다. 일정을 잘 조정하면 일주일 이상 ‘초가을 휴가’를 즐길 수 있다. 여름철 번거로움을 살짝 피해 모처럼 호젓하게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 가을의 문턱에 가볼 만한 해외 여행지 네 곳을 소개한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핀란드 출신의 방송인 살미넨 따루씨가 자신의 글에서 '엄마가 만든 블루베리 파이'를 자랑한 적이 있다. 그는 "고향 집은 문만 열면 숲인데 여름이면 야생 블루베리와 클라우드베리, 산딸기가 많아 주부들이 베리 따느라 바쁘다"며 "우리 부모님도 여름만 되면 갓 딴 블루베리로 파이를 만들었다며 내게 전화로 자랑해 군침이 돌게 만든다"고 했다. 지난 7월 말 수도 헬싱키와 북부 도시를 가볼 기회가 없었다면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핀란드의 산천은 따루씨 말 그대로였다. 포장 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사방이 블루베리 천지였다. 북부 도시에서 태양은 서쪽이 아닌 북쪽으로 졌다가 1시간 만에 다시 떠올랐다. 헬싱키와 주변 도시에선 핀란드 예술가들이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빚어낸 건축물과 생활용품들이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었다.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고 '삶의 아집' 같은 것을 내려놓게 하는 북구(北歐) 여행이었다.

누욱시오 국립공원의 이끼.
누욱시오 국립공원의 이끼.
치유의 숲 '누욱시오 국립공원'

헬싱키에서 서북쪽으로 30㎞ 정도 떨어진 누욱시오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경. 북유럽식 투박한 영어 악센트로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생태해설가를 따라 숲길로 들어섰다. 핀란드 남부 최대 국립공원인 이곳은 아름다운 화이트피시(송어) 호수를 끼고 자작나무와 낙엽송 소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등산로 주변 소나무 밑동은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다. 자세히 보니 이끼였다. 해설가 에포씨는 "이끼는 수분을 저장해 나무를 보호하면서 엘크와 순록의 먹이가 된다"고 했다. 등산로를 따라 블루베리가 지천으로 깔려 신발에 밟혀 터졌다. 마음껏 따 먹으라는 에포씨의 말에 따라 우리는 '노다지'라도 발견한 듯 손과 입이 붉게 물들 때까지 블루베리를 따 먹었다.

트레킹 후 호숫가 통나무집 사우나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거울같이 맑은 호수를 바라보며 맥주 한잔 기울이는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에포씨는 "겨울이면 사우나에서 몸을 데운 뒤 호수의 얼음을 깨고 물속으로 뛰어든다"고 했다. 왕복 4㎞의 산행과 뜨거운 사우나는 스트레스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듯했다.

백야의 일출(日出)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1시간 20분 비행기로 날아가면 북극권의 도시 로바니에미에 닿는다. 북극이 지구의 정수리라면 이곳은 지구의 '이마'에 해당한다. 겨울이면 최저 영하 40도까지 떨어지고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여 스키점프대회가 자주 열린다. '산타마을'로도 유명하다. 눈 없는 여름철 로바니에미 여행의 재미는 야간 산행이다. '미드나잇 선 페스티벌'이란 명칭이 암시하듯 한밤중에 '해'를 보는 산행이다. 해발 180m의 낮은 구릉인 카트카 지역은 처음엔 숲길이 이어지다가 곧 암석지대가 나타난다. 1만년 전 2㎞ 두께의 빙하가 눌러 만든 돌들이 산을 뒤덮고 있다. 영상 10도 정도 날씨에 바람마저 차가웠다.

거대한 바위 가운데를 파서 만든 헬싱키의 록처치.
거대한 바위 가운데를 파서 만든 헬싱키의 록처치.

밤 11시 50분, 북쪽 하늘 끝에 붉은 노을이 퍼지더니 해가 구름 아래로 떨어졌다. 일몰(日沒)이다. 우리는 부근 움막으로 옮겨 장작불에 소시지를 구워 먹고 약 1시간 뒤 산 정상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이런 일이….' 방금 졌던 해가 그곳에서 다시 솟고 있었다. 백야(白夜)의 일출(日出)이었다. 과학적 상식은 무너졌다. 우리는 지구의 '이마'에 올라 태양과 지구가 빚어내는 신비롭고 거대하며 거역할 수 없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하늘의 붉은빛이 침엽수림의 어둠을 서서히 걷어냈다. 자연의 대역사(大役事)에 인간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우리는 젊은 트레킹 조수가 준비한 스파클링 와인잔을 부딪치며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새날을 환영했다.

핀란드인의 자아 찾기 '공공 건축 디자인'

핀란드는 오랫동안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1917년에야 독립국이 됐다. 1800년대 핀란드인들은 '무엇이 핀란드인가(미까 온 수오미)' '우리는 누구인가(께이따 메 올렘메)'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한다〈'북유럽의 외로운 늑대, 핀란드' 참조〉. 그리고 수백년 이민족 통치에도 고유언어를 지켰다.

핀란드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는 '공공건축 디자인'도 '자아찾기'의 일환이다. 건축가 알바르 알토가 디자인한 핀란디아홀과 키아스마 현대미술관 등이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헬싱키에서 가장 놀라운 건축물은 '록처치(Rock Church)'였다. 거대한 바위 가운데를 둥글게 파서 교회를 만들고 지붕은 우주선 같은 동판과 유리로 덮었다. 인간의 기술이 자연과 어디까지 조화를 이룰수 있는지 보여준다. 헬싱키 대성당은 순백의 벽과 녹색의 원형 지붕이 간결미와 고결함을 자랑한다. 헬싱키의 밤거리를 나서면 수많은 건축물이 조명 속에 빛난다. 핀란드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안애경씨는 저서 '핀란드 디자인 산책'에서 "이는 헬싱키 시정부가 건축물에 빛을 입히는 작업을 해온 덕분"이라며 "어둡고 긴 겨울철 도시에서 빛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이 큰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헬싱키 외곽 역사 도시 포르부에 있는 문을 닫은 공장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
헬싱키 외곽 역사 도시 포르부에 있는 문을 닫은 공장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

여행수첩

핀란드 국적기인 핀에어가 매일 1회 서울~헬싱키 구간을 운항하지만 좌석이 부족할 때가 많다. 일본항공(JAL)은 지난 7월 1일부터 도쿄(나리타)~헬싱키 직항노선을 열고 최신 기종 B787을 투입했다. 한국 고객을 위해서는 인천에서 출발해 도쿄에서 1박(호텔 무료 제공)하고 헬싱키로 가는 상품을 내놓았다. 가격은 직항편보다 20% 싸다. 도쿄에서 지인을 만나거나 시내 관광하기에 좋다. 기내식은 일본 특유의 깔끔함과 맛을 자랑한다. 9월 말까지 이 항공편으로 헬싱키를 거쳐 다른 북·중유럽 도시로 가더라도 같은 요금을 받는다. 통화는 유로화를 쓰고 한국에서 환전해 가는 것이 좋다. 전압은 한국과 같은 220V지만 지방은 콘센트가 '11'자형인 경우가 있다. 비자 없이 3개월 체류가 가능하다.

헬싱키 외곽에 600여명의 예술가가 모여 사는 피스카르스 마을은 이탈라·아라비아·해크먼 등 유명 브랜드가 탄생한 곳이다. 핀란드의 옛 수도 투르쿠, 인사동 같은 전통 카페 거리를 가진 포르부, 어린이 놀이공원 무민월드, 스파가 있는 나안탈리,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 음악가 시벨리우스의 고향 하민리나 등도 볼만하다. 헬싱키 시내에서 프린트 옷감으로 유명한 마리메코와 아라비아 도자기 등 실용적 디자인의 생활용품 가게를 구경하는 즐거움도 크다. 헬싱키의 카펠리(KAPPELI), 투르쿠의 피넬라(pinella) 식당의 연어 스테이크가 맛있다.

핀란드는 겨울(11~3월)은 길고 여름(6~8월)은 짧다. 백야(白夜)인 여름 3개월은 두꺼운 커튼을 쳐야 잠을 잘 수 있다. 9월이면 백야가 끝난다(일몰 20시, 일출 06시). 헬싱키의 9월 기온은 20도 내외여서 여행하기 좋다. 겨울에는 하루 종일 전등을 켜놓고 여자들은 초콜릿을 먹고 남자들은 보드카 '코스켄코르바(koskenkor va)'를 마신다. 넓이 500㎡ 이상의 호수가 18만7888개, 섬이 17만9584개나 된다. 시차는 6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