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최고의 와인? 어제 저녁 연인과 마신 포도주"

제임스 서클링(Suckling·55)은 로버트 파커(세계 3대 와인 평론가)와 함께 업계에서 알아주는 와인·시가 평론가다. 1981년부터 30년간 와인 전문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글을 쓰며 선임 편집장과 유럽 지부장을 지냈다. 하지만 그전에 위스콘신대에서 저널리즘 석사과정을 밟으며 사건·사고를 취재·보도하는 경찰기자로 일해본 그는, 국제 세무 변호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법을 공부해보고 싶었다. 1981년 23세 때 법학대학원 입학 허가서를 받은 날 아버지가 다가와 말했다. "나는 변호사로 이 와인을 마시지만 너는 이걸 직업으로 삼을 수 있지 않겠니?"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는 와인 향이 넘실댔어요. 아버지는 항상 좋은 와인을 마시려고 했고, 덕분에 저도 프랑스 와인, 미국 와인, 칠레 와인을 골고루 맛볼 수 있었죠."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만난 서클링은 "와인은 타임머신과 같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 그 와인을 만들 당시의 흙·물·비·바람과 사람이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진다"고 말했다. 서클링은 지난 1~3일 서울에서 열린 '2013 문화소통포럼'에서 강레오 셰프가 준비한 한식 만찬에 어울리는 와인으로 2010년산 로버트 몬다비 카베르네 소비뇽과 2011년산 로버트 몬다비 샤르도네를 제안했다.

와인 전문가인 그가 문화 간 소통에 관심을 갖고 거마비(車馬費)도 받지 않고 한국에 온 까닭은 '소통에서 와인은 촉매제 역할을 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알리기 위해서'다. 와인뿐 아니라 다른 술도 친밀감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묻자 "맥주는 음식과 함께 먹을 수 없다. 모든 음식과 잘 어울리는 유일한 술은 와인"이라고 했다. "와인은 문화이자 역사예요. 수천년 전 그리스 로마에서 만들어졌고, 이후 전 세계로 퍼지며 기독교·유대교 역사에서도 한 축을 맡았죠."

양념을 많이 사용해 자극적이고 채소가 주재료인 한국 음식이 뜻밖에 와인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한국 음식은 한 밥상에 달고 짜고 맵고 신맛이 고루 올라가 있어서 웬만하면 거의 모든 와인과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제 미래의 아내(한국인 와인 무역상 김마리씨)가 잡채, 김치전을 기막히게 만들어줘요. 고깃국과 생선찜 같은 주요리 한두 개에 작은 반찬이 많아서 맛 자체가 복합적이잖아요. 중국 음식은 전분을 많이 넣고 볶아서 기름기가 오래가는데, 한국 음식은 색깔은 컬러풀하지만 재료의 신선함이 살아 있어서 좋아요. 굳이 완벽한 와인을 찾는 데 집착하지 마세요. 서양인의 와인에 대한 생각을 좇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좋은' 와인이면 돼요." 그는 "그래도 하나를 찾자면 한국 음식에는 끝 맛이 드라이한 와인이 잘 어울린다.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방 온도보다 조금 더 시원하게 해서 맛있는 음식과 즐겁게 먹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서클링은 파리에 살면서 유럽의 거의 모든 와인을 맛봤다. 특히 보르도 와인, 이탈리아 와인, 포트 와인을 잘 평가한다. 그런 그에게 좋은 와인은 뭘까. "한국에서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성공을 상징해요. 어떤 와인을 마시느냐가 그 사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라벨을 마시는 사람'이 많다는 거죠. 멍청해 보일까 봐 혹은 있어 보이려고 품질보다는 상표에 매달려 비싼 와인인지 아닌지를 따져요." 그는 "값싼 와인도 내 입맛에 맞고 편안히 마실 수 있으면 그게 곧 좋은 와인"이라고 강조했다. 이 계절, 그가 한국인에게 추천하는 한 병의 와인도 "어제저녁, 사랑하는 사람과 근사한 저녁을 보내게 해준 맛있는 와인"이다.

2010년 쉰두 살 되던 해에 서클링은 '와인 스펙테이터'를 미련 없이 그만두고 멕시코에서 '원 와인 원 월드(One Wine One World)'라는 자선 와인을 만들었다. 특정 종교와 문화를 넘어 전 세계인의 화합을 비는 마음에서 멕시코와 미국·프랑스에서 생산된 포도를 여러 종 섞어 만든 와인이다. 수익금은 가톨릭 신부가 유대교인·이슬람교인·기독교인을 하나로 모으는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주교들과 점심 식사를 할 때 그 와인을 두 번이나 마셨다"며 뿌듯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