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처럼 누나처럼… 중장비업체를 보듬다

백상태(64)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재무 담당 부사장이 오래전 다른 외국계 업체 한국 지사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 한국인 지사장이 아들에게 선물할 데스크톱 컴퓨터 한 대를 구매하라고 했다. 규정상 불가능했지만, 회계 윤리가 지금보다 한참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지시를 받은 직원이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모르자, 선임이었던 백 부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네, 사장님. 12개월 할부로 사드릴까요?" 머쓱해진 사장은 다시 컴퓨터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 일로 원칙주의자라고 소문이 나버렸죠. 하지만 어떤 경우든 페어(fair·공정)한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단, 같은 말도 듣기 거북하지 않게 돌려서 말해야죠. 그게 여자가 남자보다 나은 부분 아니겠어요?"

세계 최대 중장비 업체 볼보건설기계의 한국 법인에는 여성 부사장이 2명 있다. 백 부사장과 인사 담당 오숙희(56) 부사장은 남성적이기로 유명한 중장비 업계에서 보기 드문 '여걸(女傑)'이다. 남자 직원이 지천인 이 회사는 직원 1600명 중 여직원 비율이 7%도 안 되지만, 부사장 5명 중에서는 여성이 2명을 차지하고 있다.

오 부사장은 매주 서울 한남동 본사에서 공장이 있는 경남 창원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직원들을 끊임없이 '스토킹'한다. 직원들이 찾아와 애로 사항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직원들을 쫓아다니면서 "점심 같이 먹자"고 조르고, 힘든 점은 없는지 묻는다. 웬만한 집안 대소사는 꿰고 있을 정도다. 최근엔 한 남자 직원이 육아 문제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이 회사 남자 직원 최초로 육아 휴직을 쓸 수 있게 해줬다.

"머리 희끗희끗한 아줌마가 다가가 말을 거니, 무뚝뚝하던 남자 직원들도 엄마 같고 누나 같은가 봐요. 격의 없이 챙겨주는 인사 담당자라는 평가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 같습니다."

오 부사장은 올해로 직장 경력 34년, 백 부사장은 40년이 됐다. 두 명 모두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면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고비도 많았다. 오 부사장은 "그럴 때마다 첫 출근 날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가 갓 대학을 졸업한 1980년엔 대졸 여성 신입 사원을 뽑겠다고 공고를 낸 기업 자체가 드물었다. 운 좋게 외국계 제약사에 입사할 수 있었는데, 비서직을 빼면 유일한 대졸 여성 사원이었다.

"첫 출근 날 회사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왔어요. 대학 나온 여자 사원 들어왔다고요. 계약서를 받아 들었는데, '당신은 정년(55세)까지 일할 수 있고…'라는 문구를 보고 울 뻔했어요. 나도 사람 대접 받는구나 싶어서요."

백 부사장은 "분노가 나의 힘"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려는데, '남편이 얼마나 못났기에 유부녀가 직장을 찾느냐'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증은 따기 쉽다던데, 그걸로 전문성이 있겠느냐' 등 별별 질문을 다 받았어요." 이런 경험 때문에 백 부사장은 약자를 배려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한국 남성 직장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더 원칙과 실력으로 무장하려고 노력했다.

인사 담당 오 부사장은 젊은 여성 후배들을 향해 쓴소리도 했다. "요즘 친구들은 표현이 자유롭고 공정하지 않으면 못 참지요. 하지만 의지는 박약해요. 중요한 결정 순간에 아직도 '부모님한테 물어보겠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건 회사 그만둘 때지요." 남을 더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결국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온다는 조언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