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협찬 안 하는 이유? 유명세 타면 삶만 팍팍해지니까

어떤 패션 디자이너는 그가 만든 옷보다 말투나 행동으로 더 유명하다. 김서룡(53)은 정반대다. 대중은 그의 이름을 잘 모른다. 하지만 눈만 돌리면 곳곳에 '김서룡 옴므'의 옷을 입은 남자가 보인다. TV 드라마·광고·전광판·잡지 화보…. 숱한 연예인과 모델이 그의 옷을 입고 나온다. 월드 스타 싸이가 작년 5월 미국 진출을 준비하면서 맞춘 두 벌의 양복도 김서룡의 것이었다. 싸이는 그 옷을 록펠러 센터 앞 공연 때 입고 춤을 췄다. 김서룡은 그러나 이런 일에 통 무심하다. "그런 걸 뭐하러 알리나요? 일만 더 많아질 텐데."

지난 15년 동안 정상을 지킨 남성복 디자이너 김서룡. 그는 그런데도 지금껏 "나 자신을 소처럼 부려 먹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내키면 그렸고, 생각나면 만들었다. 그뿐이었다.

◇'그냥' 만든 '완벽한' 정장

1960년 대구에서 2남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김서룡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계명대 미대에 진학한 그는 '옷을 내 맘대로 입어보고 싶었다.' 김서룡은 "그냥 내가 입으려고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맥주로 머리칼을 탈색하고, 마침 교실에 있던 재봉틀로 드르륵 박아 만든 바지와 셔츠를 입고 다녔다. 따로 배운 적이 없지만, 옷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만들면 저 모양이 되겠구나'가 떠올랐다. 김서룡은 "디자인은 그렇게 특별한 계기도 목적도 없이, 물 흐르듯 내게 왔다"고 했다.

졸업 후 서른다섯 살까지 전업 미술 작가로 활동했다. 1995년엔 친구 아내의 부탁을 받고 웨딩 드레스를 한 벌 만들었다. 그러자 "나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레지옹 마리에'라는 이름으로 웨딩드레스 가게를 차렸다. 이번엔 예비 신랑들이 김서룡의 옷을 보고 "당신 정장은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다. "만들었다"고 하자 사람들은 "나도 만들어달라"고 했다. 1998년 '김서룡 옴므'를 시작했다. 좋은 재료로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만든 한 벌의 정통 슈트. 날렵한 도시 남자의 옷이라기보단,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장인의 냄새가 나는 옷. 그의 옷엔 항상 여백의 멋이 흘렀다. 2001년엔 서울컬렉션을 시작했다.

◇옷 팔기 싫어하는 디자이너

그의 옷은 비싸다. 재킷 한 벌에 200만원 정도 한다. 그래도 만들자마자 바로 팔린다. 패턴 뜨는 것부터 마지막 마무리까지 직접 한다. 옷감도 일일이 염색한다. 몇몇 컬렉션에서 발표한 작품은 아예 팔지도 않는다. "이걸 팔면 또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힘들잖아요."

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연예인에게 공짜로 옷을 빌려주는, 소위 '협찬'을 한다. 홍보를 위해서다. 김서룡은 그러나 공짜로 옷을 주거나 빌려주는 경우가 없다. 빌려줄 때도 꼭 돈을 받는다. "제 옷이 좋으면 돈을 내야죠. 유명하다고 돈을 안 받으려고 하는 건 이해가 안 돼요. 그리고 그렇게 홍보해봤자 일 많아지고 피곤해지는 것밖에 더 있나요.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쁘게 살고 싶진 않아요.(웃음)"

◇옷의 여백, 삶의 여백

김서룡의 집에는 TV도 장식장도 없다. 화가인데도 벽에 그림 한 점 걸지 않았다. 부엌엔 밥그릇이 딱 두 개다. 닦지 않은 그릇을 싱크대에 마구 쌓아놓는 게 싫어서 숫자를 줄였다. 김서룡은 "화려하고 근사한 인테리어가 때로는 너무 시끄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답답할 땐 절에 가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교 신자였어요. 이젠 어머니가 못 드리는 백팔배를 제가 대신 합니다."

어머니는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8남매를 홀로 키웠다. 평생 "욕심부리지 마라, 안달하지 마라, 때가 되면 다 된다"고 말하던 분이었다. 김서룡은 "그래서 일하기 전에 항상 '이게 욕심인가, 열정인가' 생각해본다"고 말했다. "나이 먹을수록 욕심과 열정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애쓰죠."

최근 그는 미국 뉴욕 '콘셉트코리아' 행사를 통해 뉴욕 쇼룸에 옷을 걸게 됐다. 오는 10월엔 영국 패션쇼 무대에도 선다. 그러나 김서룡은 "앞으로도 모든 걸 순리대로 할 뿐 일부러 계획하진 않겠다"고 무심히 말했다. "넘치는 건 매력 없으니까요. 옷도, 인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