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세트 대신 '책세트'

추석에 한우, 굴비, 돌김이 아니라 책이 선물로 배달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물어보나마나다. 먹을 수도 없고 누구에게 주기도 난감한 처치 곤란. 읽을 게 흔한 시대에, 게다가 명절 선물이라면, 피할 수 없는 책의 숙명처럼 보인다.

그런데 괴상한 일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서점에서 '책 세트'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다. '책을 건네는 추석'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부모님·아이들·친구(동료) 추천세트를 판매 중인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1Q84'(전 3권)는 9월 들어 11일까지 140세트가 팔렸다. 8월 마지막 1주일(60세트)에 비해 1.5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책은 도끼다'와 '여덟 단어'를 묶은 박웅현 세트의 경우 이 기간에 90세트가 팔려, 8월 마지막 주(4세트)보다 판매량이 폭증했다. 박웅현 세트를 펴낸 북하우스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김보미씨는 "고전(古典)이라는 키워드 때문인지 40대 독자를 중심으로 추석 선물용으로 인기"라고 했다.

예스24에서는 이달 들어 조엘 디케르의 소설 'HQ 해리 쿼바트 사건의 진실'(전 2권)이 100세트, '박혜란의 육아 이야기'('다시 아이를 키운다면'+'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140세트,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솔로몬의 위증'(전 3권) 70세트,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7권)가 55세트 판매됐다. 최세라 예스24 도서팀장은 "상품 구성과 할인율은 평소와 같은데, 닷새 연휴를 앞두고 호흡이 긴 독서를 준비하는 독자가 늘었다"면서 "30대 싱글 여성이 친구나 자신에게 선물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비상대책(값비싼 상품 대신 책을 선물하세요)' 코너를 만들었다. '시집가는 딸에게' '머리를 9하라' '십대답게 살아라' 등 추석 선물용 책을 선정해 따로 진열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전 3권) 세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전 3권) 세트 등의 판매도 호조세다. 교보문고 김현숙 파트장은 "명절을 앞두고 특히 어린이책 판매가 늘고 있다"고 했다.

출판사가 단독으로 책 선물 꾸러미를 기획하기도 한다. 문성희가 쓴 '평화가 깃든 밥상'(샨티)은 3권 한 세트(정가 4만5000원)를 택배비 포함해 30% 할인가에 판매한다. 도서출판 리스컴은 어린이 세트, 예비엄마 세트, 건강 세트, 그림책 세트 등 '도서선물세트' 4종을 내놓았다. 박정은 샨티 출판사 대표는 "서점에 공급하는 가격으로 독자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9월이 독서의 달이지만 도서 판매는 해마다 가을에 연중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다. 밖으로 나가 놀기 좋은 계절이라서다. 추석 선물용 책 세트 판매를 '재고 털기'로 볼 수만은 없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명절의 성격이 '또 다른 휴가'로 바뀌었다. 쉬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기에 책만 한 친구도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