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입·대입·司試 줄곧 낙방… 그래도 그게 제 밑천이었죠

은행원들은 행장이 될 확률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확률'이라고 한다. 직원이 1만5000명 정도인 우리은행은 매년 200명 정도 대졸 사원을 뽑는다. 은행장은 서너 기수에 1명 정도 나오니 경쟁률이 600대1이 넘는 셈이다. 더구나 우리은행은 1999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한 뒤 2008년까지 10년간 계속 관료 출신 등 외부에서 행장이 영입됐다.

나는 1977년 상업은행 말단 은행원으로 입행해 34년 만인 2011년 은행장에 올랐고, 올해 6월에는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했다. 많은 사람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기적이 일어났다"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어떤 이들은 성공 비결을 묻기도 했다. 나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인패위성(因敗爲成·실패로 말미암아 성공을 이룬다)'이라는 사자성어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이순우'는 승승장구하는 CEO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실패'를 꼬리표처럼 달고 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손자가 검사가 되길 바라셨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명문 중학교 시험에 떨어져 집 근처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명문고에 진학하려고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하지만 명문고 입시에서 또 떨어져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답답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학교 입시 역시 연거푸 실패의 잔을 마셨다. 서울대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에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했는데 떨어졌다. 재수까지 하며 다시 도전했지만 또 떨어졌다. 결국 2차 대학으로 갔다. 대학교 2학년부터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군대를 갔다 온 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사법시험을 준비했지만 실패를 거듭하기엔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검사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은행에 입사했다.

1977년 사령장을 받고 서울 을지로지점에 배치를 받았다. 은행에 들어왔지만 오랜 시간 간직해왔던 법조인의 꿈을 접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지만, 말 그대로 대충대충, 설렁설렁 일을 했다.

의욕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친한 선배가 "술 한잔하자"고 했다. 포장마차에서 말없이 술잔을 채워주던 선배가 "그렇게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머릿수나 채우고 있을 거면 그만둬라"며 진지하게 충고했다. 선배의 말이 내 가슴을 송곳으로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선배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혼자 술을 마시며 한참을 울었다.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속 한구석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내 인생에 더 이상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되뇌며, 은행원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스스로를 돌아봤다.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이순우 주임'은 잘 웃지도 않고 주변에 사람도 없으며, 하는 것마다 실수투성이였다. 현실을 직시하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매일 웃는 연습부터 했다. 세수할 때, 길을 걷다 유리벽을 마주할 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 말을 귀담아들으려 했다. 실수를 해서 선배들에게 질책을 들어도 겁내지 않았다. 대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수첩에 메모해놓고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을지로지점 대부계 이순우' 하면 "똘똘하고 일 잘하고 잘 웃는 촌놈"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행원 이순우'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앞 발자국만 보며 가자'는 다짐 하나로 살아왔다. 내딛는 발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서 걸었고, 2002년 드디어 임원으로 승진하며 기업금융단장을 맡았다. 임원이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곧 큰 시련이 닥쳤다. 2003년 국내 최대 신용카드사였던 LG카드의 유동성 위기가 표면화된 것이다. 카드채 22조원을 발행했고 자산 26조원, 회원 수 1111만명에 이르는 LG카드의 부도 위기로 국내 금융시장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우리은행은 LG카드의 주 채권 은행이었고 나는 담당 임원이었다. 평탄했던 은행원의 삶에 또다시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부도 위기 속에 LG와 채권 은행단의 피 말리는 협상이 진행됐다. 나는 연일 채권단 회의를 주재했다. LG 측과 채권단의 첨예한 대립을 풀고 채권 은행 간 이견을 조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를 위해서 서로 한 발자국만 물러서자"며 때로는 읍소로, 때로는 강단 있게 밀어붙였다. 땀은 배신하지 않았다. 8개 채권 은행과 LG그룹의 추가 지원 및 양보를 이끌어내며 LG카드 정상화 방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뒤 2004년 경영지원본부장으로 부행장 직함을 달았고, 개인고객본부장도 지냈다. 기업금융과 개인금융, 인사, 경영기획 등 은행 전반 업무를 섭렵했다. 많은 부서와 직책을 경험했지만 항상 잊지 않았던 것은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앉아 있는 자리가 아닌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어느새 '은행장' '회장'이라는 명함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내가 거듭된 실패에 좌절하고 주저앉아 버렸다면, 나는 지금 그렇고 그런 월급쟁이였을 것이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실패를 성공으로 이어지는 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실패를 포기로 생각하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려서부터 실패를 많이 해서 그럴까? 다행히 나는 실패가 두려워서 멈춰 서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가 내가 가진 자산이라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성공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 우리금융의 후배 2만8000여명, 나아가 우리 경제를 짊어질 모든 젊은이가 실패를 두려워 말고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으면 한다.


[이순우 회장은 누구]

行長된 뒤로도 점퍼 입고 거래처 찾은 '영업의 달인'

1950년 경북 경주 출신이다. 대구고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상업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고, 행원 시절 대부 담당부터 시작해 비서실과 인사부, 홍보실을 두루 거쳤다. 1999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해 출범한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의 첫 인사부장을 지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영업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경영지원본부장과 개인고객본부장을 모두 역임했다. 기업금융과 개인금융, 인사, 경영기획 등 은행 전반의 업무를 섭렵했다.

행장이 된 뒤에도 작업복 점퍼를 입고 승합차를 타고 중소기업들을 찾아다닐 정도로 거래처 방문 등 현장을 중시했다. 지난 6월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선임됐으며, 우리은행장도 겸임하고 있다. 회장이 된 뒤에도 행장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차량도 회장에게 제공되는 에쿠스 4600cc 대신 행장 시절 타던 에쿠스 3800cc를 계속 이용한다. 정부가 우리금융지주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지주사 체제를 해체할 방침이라 마지막 우리금융 회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