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에 '희망'을 찍어주는 할아버지

"전국에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의 숫자가 벌써 20만명 수준입니다. 그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 우리가 잘 가르쳐야 해요."

한용외(66) 인클로버재단 이사장은 중국·일본·베트남·필리핀 등 외국인 여성들이 한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룬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사진 찍어주는 할아버지'로 통한다. 지난 2010년부터 햇수로 4년째 그는 전국을 돌며 다문화 가정의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삼성전자 사장, 삼성사회봉사단 사장 등을 지내고 2009년 퇴임한 기업인 출신인 그는 퇴임하던 해에 사재 10억원을 들여 복지 재단을 세우고 이 일을 시작했다.

24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의 재단 사무실 한편은 카메라와 사진 출력용 대형 프린터, 조명, 삼각대 등 촬영 관련 물품이 그득했다. 직원들은 벌써부터 내년 촬영 일정을 짜고 있었다. 그는 "한 달에 최소 두 곳씩 1년에 24곳을 가야 하니 서로 겹치지 않게 일정을 조절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는 한 번 촬영을 나가면 최소 20~30가구의 가족사진을 촬영한다. 대형 사진 인화 출력기에 조명등, 배경지, 액자까지 스튜디오 하나가 통째로 움직인다. 사진은 현장에서 A3 크기 대형 용지에 인화해 큼지막한 벽걸이 액자에 넣어 바로 전달한다. 자원봉사자를 포함해 한 번에 움직이는 사람만 10~15명. 이렇게 지금까지 전국 1440가구에 가족사진을 선물했다. 올 연말이면 1500가구를 넘어선다. "다문화 부부는 결혼식 사진은 물론이고, 가족사진도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한껏 차려입고 와서 다들 즐거워하죠. 집에 걸어 놓고 가족의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요." 그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였다.

한 이사장이 보여준 사진 속의 아이들은 모두 해맑게 웃고 있었다. 엄마 나라의 전통 복장을 입은 아이들도 있고,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도 있었다. "피부색도 다르고 외모도 다르지만 모두 한국인들이에요. 자라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되겠죠. 우리는 그런 미래에 얼마나 대비하고 있을까요."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비는 사이 한 이사장은 다문화 가정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 연령대에선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60% 이상이 중도에서 탈락한다"며 "그 아이들이 결국 뭘 하겠느냐. 학교도 안 가고 외모도 다르고, 한국말도 서툰 아이들이…"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 해 탄생하는 다문화 커플의 30%에 해당하는 커플이 이혼하는 현실에서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갖춘 대안 학교가 절실하다"며 "전국 시·도마다 두 곳씩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한 이사장은 퇴직 후 복지 분야에 투신한 것에 대해 "나는 원래 이쪽 취향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삼성전자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그는 1993년 말 삼성그룹의 문화·복지·공익재단을 총괄하는 삼성문화재단 전무로 발령 난다. 그렇게 처음 문화 사업과 공익사업을 접했다. 7년 뒤 2000년 삼성전자 생활가전 사장으로 현업에 복귀했던 그는 2004년 다시 삼성문화재단 총괄사장으로 돌아왔고, 2007년부터는 퇴직 때까지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을 맡았다. 한때 삼성의 문화·복지·공익 사업을 총괄했던 그가 문화와 복지가 결합된 활동을 인생 후반기의 과업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2004년에는 아예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에 진학해 2011년 2월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사진은 조세현 작가 등 전문가들로부터 배웠다. 삼성전자 CEO 시절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해 배운 것이 취미를 넘어서는 수준이 됐다. 오는 10월 9~15일에는 서울 청담동 '원갤러리'에서 첫 개인전도 연다. 전시회는 재단 운영을 위한 모금 행사로 마련됐다. 그는 "1500가구나 되는 가정의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동안 한번에 움직이는 사람도 많고 재단 출연금 이자만으로는 비용이 모자라 개인 돈도 많이 쓴다"며 "그래도 꾸준히 도움을 주는 분들이 계셔서 힘을 얻고 있다"고 했다. 매달 두 번씩 삼성전자의 후원을 받아 다문화 가정 아이 40명을 불러 사진 찍는 법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나쁜 쪽으로 빠져들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2년째 나오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한 이사장은 앞으로도 카메라를 놓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내가 학창 시절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나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전국적인 명문이었던 경북중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아놓고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입학을 못 할 뻔한 적도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도움을 주는 분이 나타나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 이사장은 정부의 다문화 관련 정책에 대한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이미 저소득층이나 농어촌 지역에서부터 다문화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면서 "정부에서는 여러 부처가 한꺼번에 달려들다 보니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중복 투자를 하거나 각종 센터를 겹치기로 세우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