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이준익

"설마 또 우는 거야?"

25일 오전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영화 홍보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이준익(54) 감독을 보고 지나가던 배우 설경구(45)가 물었다. 이준익은 "아직도 인터뷰할 때마다 울컥해"라고 답했다. 그런 농담을 던진 설경구도 23일 열린 '소원'(10월 2일 개봉) 언론 시사회에서 엉엉 울어버리는 바람에 기자 간담회가 늦어졌다.

―영화를 보면서 울었나.

"볼 때마다 운다. 찍을 땐 더 힘들었다. 감정 과잉으로 관객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고 했는데도 배우들이 감정 자제하는 걸 힘들어했다. 예를 들어서 소원이가 회복실에서 깨어나 '아빠 회사 안 가?'라고 하면 설경구의 눈에선 바로 눈물이 솟구쳤다. 그걸 참다가 '컷' 하고 나서 막 울었다.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다 그랬다."

―그래도 영화는 어둡지 않다. 특히 소원이의 가족이 친구와 사회로부터 배려와 도움을 받는다는 부분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졌다.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믿는 건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지? 그걸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일을 살아갈 수 있나?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그래도 선의(善意)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나도 부모·형제와 친구들, 동료들의 선의 덕택에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현실이다."

―영화는 현실에서 한발 더 나아가 판타지에 가깝다. 그래서 제목도 '소원' 아닌가.

"영화에서 코코몽(어린이 애니메이션 캐릭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끔찍한 현실이다.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판타지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간에 마음이 있으나 현실은 그걸 서로 마주 보지 못하게 하는 간극을 만든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동화를 잃어버리고 외로워졌다.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아버지가 양말에 선물을 넣어준다는 걸 알고 난 뒤에 더 행복해졌나? 내가 거짓말쟁이가 돼도 상관없으니 동화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

첫 영화 '키드 캅'(1993)의 실패 이후 10년 만에 '황산벌'(2003)로 '흥행 감독'이 된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2005)로 '1000만 감독'에까지 오른다. 그 후 1년에 한 번꼴로 영화를 내놓던 그는 '평양성'(2010)의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자 2011년 초 트위터에 '평양성, 250만에 못 미치는 결과인 170만. 저의 상업영화 은퇴를 축하해 주십시오'란 문장을 올렸다. 대중은 이를 '은퇴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2년 전 '트위터 필화(筆禍)' 이후로 상업영화는 그만둔 것 아닌가.

"당시 나무 심으러 몽골로 떠날 때 웃는 이모티콘(^^)까지 써가며 농담처럼 올린 거다. 3일 후 몽골의 공항에서 보니 지상파 뉴스에까지 보도가 됐더라. 뭐 어쩌겠나. 그 이후로 40여편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는데 다 거절했다."

―그런 것치고는 금세 작품을 내놓은 편이다.

"이 영화를 보는 것보다 시나리오를 읽는 게 더 힘들었다. 상상해야 하니까. 내가 정면으로 쳐다본 적도 없고 애를 써서 알아보지도 않았던 문제였다. 그런데 거절하기가 미안하더라. 그러고서 통계와 자료를 찾아보니 신고된 아동 성폭행만 하루 평균 3건이란다. 그 아이와 그의 주변인까지 따지면 피해자가 몇 명이나 되는 건가. '이걸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 이전에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에이, 그냥 하자'고 마음먹었다."

'소원'은 이미 알려진 사건을 파헤쳐 고발하는 게 아니라 사건 이후 일상을 파괴당한 이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연민이나 동정보다는 응원에 가깝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직후, 한 성폭행 피해자 여성이 이준익 감독에게 이런 내용의 엽서를 내밀었다. '만약 감독님이 이 엽서를 받았다면, 그건 영화를 잘 만드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영화 '소원' 은…]

피해아동 아버지가 말했다… 제발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소원'은 2009년 세상에 알려진 아동 성폭행 사건, 일명 '조두순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코코몽'을 좋아하는 아홉 살짜리 소원이(이레)는 등굣길에 술에 취한 남자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한다. 그 때문에 장기 일부가 파괴돼 배변 주머니를 차고 다닐 뿐만 아니라 말을 잃고 남성이라면 아빠의 손길과 눈길까지도 거부한다. 입원비와 수술비에 아버지(설경구)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임신 중인 어머니(엄지원)는 쓰러진다. 아버지는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소원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꺼이 '코코몽'이 된다.

이준익 감독은 실제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를 두 차례 만났다. 당초의 우려와 달리 아버지는 오히려 그에게 "제발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