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만조니 극장 '펜디와 영화展', 스크린에 수놓은 옷 한 벌, 영화를 완성시키다

오래된 필름들이 켜켜이 쌓인 시네치타(Cine Citta·1937년에 만든 이탈리아 영화 스튜디오) 사이로 모피를 입은 한 여자가 걸어간다. '쿠오 바디스'와 '벤허'를 찍으며 세계 영화사를 화려하게 밝혔던 그곳은 잿빛이다. 그의 발걸음은 눈(雪)이 사뿐히 내려앉은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의 잔해로 이어진다. 여자의 몸에 무심하게 툭 걸쳐진 모피는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진 이탈리아의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달콤한 인생'이란 뜻)'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보듬었다.

21일부터 다음 달 6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 만조니 극장에서 열리고 있는 '꿈 만들기: 펜디와 영화(Making Dreams)' 전시에서 상영된 이 단편영화는 패션과 영화를 꿈결처럼 엮어냈다. 이 전시는 이탈리아 감독 루치노 비스콘티(1906~1976)의 '가족의 초상'(1974)을 복원한 패션하우스 펜디가 기획·주최했다. 펜디와 영화의 만남은 주인공 실바나 망가노(1930~ 1989)가 영화 속에서 펜디의 모피를 입고 나온 인연에서 시작됐다. 따지고 보면, 패션과 영화는 같은 피를 가졌지만 다르게 생긴 자매 같다. 조각낸 천을 바느질해 옷을 만들 듯, 필름을 잘라붙여 영화를 만든다. 패션과 영화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시대와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고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꾼다. 이 전시는 '펜디'와 '영화'라는 결이 다른 직물을 촘촘한 바느질로 이어 붙여 풍성한 환상을 한 벌 지어냈다. 수천만원~수억원대를 호가하는 모피가 십여 벌 걸린 전시는 누구에게나 무료다.

◇옷과 영화를 꿰매다

만조니 극장에선 붉은 카펫이 깔린 가파른 계단과 긴 복도를 지나야 스크린이 걸린 상영관이 나왔다.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게 호사 중 하나였던 시절의 흔적일 것이다. 천장과 벽에는 프레스코(벽화)가 그려져 있고, 붉은 벨벳 객석이 늘어선 1층과 2층 발코니가 있다. 밀라노 극장 중에서 처음으로 들여놓은 디지털 프로젝터가 갖춰진 현대적인 장소지만, 바깥세상과는 다른 시공간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1170개 객석 위로 지어진 투명한 계단과 통로 사이사이에 네 군데의 설치 전시와 세 군데의 영화 상영실 등 총 7개의 전시실이 있다. 설치 전시 사이에 영화 상영실이 있는 식이다. 각 상영실에서 틀어주는 영화는 '가족의 초상'의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와 펜디의 모피를 등장시킨 단편영화, 그리고 HD디지털로 복원된 '가족의 초상' 등이었다.

◇'뭘 좀 아는' 펜디 5자매

가장 처음 맞닥뜨리는 전시는 영국 사진작가 스노든이 찍은 펜디 가문 다섯 자매의 사진. 가죽가방과 모피를 만들던 부모의 작은 가게를 명품 회사로 일궈낸 파올라, 안나, 프랑카, 카를라, 엘다 등이다. 치렁치렁하고 풍만한 모피로 몸을 감싼 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뭘 좀 아는 센 언니'들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 맞은편엔 브랜드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는 비디오 애니메이션과 함께 안나 펜디의 딸 실비아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집 안에 흰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은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경건한 침묵을 지켰다. (중략) 이번 전시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꿈을 현실로 이루겠다는 열망을 공유한다."

조명을 넣어 빛이 나는 투명 통로를 지나자 동그랗게 솟아오른 스크린에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복원된 영화 '가족의 초상'의 장면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망가노 특유의 옆모습을 재현한 4개의 마네킹은 당시, 펜디가 제작한 영화 속 의상을 입고 있었다. 바싹 마르고 예민해서 부서질 것 같은 중년의 실바나는 모피 속에서 처연했지만 육감적이었다.

펜디의 모피가 등장한 영화 여섯 편에 실제로 쓰였던 모피가 걸린 전시실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흰색 모피가 덩그러니 걸린 공간이 나온다. 영화의 특수효과에 이용된 빛들이 매 순간 모양과 색깔을 달리하며 이를 비추고 있어 모피는 한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옷감의 하나에 불과했던 그것은 스크린이 됐고, 또 한 편의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