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네요, 뉴요커 우디 앨런

샤넬 트위드 재킷을 입고 에르메스 버킨백을 든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비행기에서부터 공항에서 짐을 찾을 때까지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를 향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 재스민이 루이비통 짐가방을 다 찾을 무렵 할머니는 마중을 나온 할아버지에게 말한다.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계속 혼잣말을 해."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은 여주인공의 혼잣말 같은 영화다. 본명이 재넷인 그는 신비롭고도 이국적인 '재스민'으로 이름을 고치고 뉴욕 최고의 금융인 할(알렉 볼드윈)과 결혼한다. 상류층 파티와 명품, 자가용 비행기에 둘러싸여 살던 그는 남편이 사기로 감옥에 들어가면서 전 재산을 잃는다. 당장 갈 데가 없어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마트 점원으로 일하는 이복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의 집을 찾아간다. 그럴듯한 직업과 자신의 신분을 다시 끌어올려줄 남자를 찾지만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과 거짓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다. 술과 우울증약을 달고 살던 재스민은 자기기만과 허상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허공에다 대고 지껄이게 된다.

'매치 포인트'(2005) 이후 단 한 작품('왓에버 웍스')을 빼고 유럽에서만 7편의 영화를 찍었던 우디 앨런이 오래간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최근 여행 엽서 같은 영화를 줄곧 찍었던 그는 서늘하면서도 서글픈 '블루 재스민'을 내놨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우디 앨런 식'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냉소적이지만 우아하고 위트가 넘친다. 아름다운 여성이 거짓과 허영으로 점철된 삶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미스터리처럼 보여주며 긴장감마저 자아낸다.

숫자놀음과 불륜으로 삶이 망가진 재스민이 생각할 수 있는 탈출구란 것은 또다시 거짓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당장 갈 데가 없는데도 수백만원짜리 샤넬 재킷과 수천만원짜리 에르메스 버킨백을 줄곧 고집하던 그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타락하고 추락한 몽상가다. 영화는 재스민의 화려한 뉴욕 생활과 허망한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재스민이 무시했던 진저와 그의 남자친구가 촌스럽고 소박할지언정 솔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끼워넣는다.

모든 배우들이 흠잡을 데 없는 적역(適役)이다. 그중에서도 투명하고 하얀 얼굴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귀족적인 얼굴로 성마르고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는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가 압권이다. 금이 간 자신의 인생이 서서히 부서져가는 것을 광기(狂氣) 어린 눈으로 응시하는 모습에선 연민마저 자아낸다. 공교롭게도 블란쳇은 2009년 뉴욕에서 연극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여주인공 블랑시 역을 했었다. 예의 바르고 다정하지만 영혼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금융 사기꾼을 연기한 알렉 볼드윈 역시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95)에서 남자 주인공 스탠리 역을 맡은 바 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느껴지는 캐스팅이다.

25일 개봉. 15세 관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