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도 배우도 생소… 개막작, 누구도 예상못했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3일 개막식을 갖고 열흘간 축제의 닻을 올렸다.

이날 오후 7시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회고전을 여는 임권택 감독과 배우 하지원, 한효주, 오다기리 조 등 국내외 영화인 300여 명과 관람객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작 부탄 영화 '바라: 축복'이 상영됐다. 개막식엔 배우 강수연과 곽부성이 사회자로 나섰다.

이날 개막식에 앞서 오후 6시쯤부터 시작된 레드 카펫 행사에는 이번 영화제에서 감독 데뷔작을 공개하는 배우 박중훈과 하정우가 등장해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개막식에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집행위원장인 샤를 테송은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영화 공로상'을, 캄보디아 리티 판 감독은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부자는 시바 신(神)을 위한 신전을 짓는다. 가난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다리가 기둥이고, 내 몸통이 제단이며, 내 머리는 금으로 만든 지붕이다.’(바사반나 820번)

1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인 키엔체 노르부 감독의 ‘바라: 축복’은 중세 인도 시인이자 성인(聖人)인 바사반나의 시로 시작한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인도 남부 지방의 전통 춤 바라타나티암과 남녀의 사랑은 모두 인간의 육체를 통해야 다다를 수 있는 영적(靈的)인 지점에 있다. 가장 통속적이고도 일상적인 소재로 인간의 몸이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신전이며, 그들 간의 사랑은 신성한 행위라고 예찬하고 있다.
인도의 시골 마을에 사는 릴라(사하나 고스와미)는 힌두 신에게 자신을 바친 사원의 바라타나티암 무희 ‘데바다시’인 어머니에게서 춤을 배운다. 순박하고 수줍음 많은 지주가 릴라를 사모하지만 릴라는 조각가를 꿈꾸는 하층 계급의 청년 샴(디베시 란잔)과 사랑에 빠진다. 이들의 관계는 지주의 마름인 수바에게 발각되고, 릴라는 천대받는 샴과 아픈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다.

인간의 육체에 집중한 화면과 몽환적인 음악이 다소 평범한 이야기의 공백을 메워준다. 특히 릴라가 춤을 출 때마다 그의 손짓과 눈짓을 지긋이 훑어내리는 카메라나 샴과 자신을 신으로 상상하는 판타지 장면은 어린 연인의 비루한 현실을 잊게 만든다. 인도의 계급 제도와 종교 그리고 여성 문제가 영화에서도 조금씩 다뤄지지만, 그 문제의 핵심에 다다르진 못한다. 처연하면서도 관능적인 이 영화는 육체와 욕망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신에 가깝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부탄 출신의 감독이 연출하고 인도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을 BIFF와 같은 대형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지난해엔 곽부성과 양가휘 주연의 홍콩 영화 ‘콜드 워’가, 2011년엔 소지섭과 한효주 주연의 ‘오직 그대만’이 개막작이었다. 둘 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배우나 감독의 작품들이다.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은 개막작을 발표하기 전부터 “올해의 개막작은 아시아의 신인 감독을 발굴하고 아시아 정체성과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BIFF의 정체성을 반영한 작품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용관 위원장은 ‘바라: 축복’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듣자마자 개막작으로 결정할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라며 “부탄 영화가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최초이며, 이 작품을 통해 아시아 영화의 저력과 잠재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3일 개막식 직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개막작 기자회견에는 남녀 주연배우와 제작자인 나넷 남스가 참석했다. 영화 제작사 측은 “노르부 감독이 동굴 수행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영화제에 보낸 ‘감독의 변’에서 노르부 감독은 “인도에선 놀라우리만치 헌신적이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환상과 실제가 합쳐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면서 “이런 믿음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믿음의 결핍은 삶을 우울하고 텅 비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키엔체 노르부 감독

키엔체 노르부(52·사진) 감독은 일곱 살 때 19세기 티베트 불교 개혁가였던 잠양 키엔체 왕포의 세 번째 환생(還生)으로 인정받은 승려다. 부탄의 2000여 승려가 속한 큰 종파의 수장이다. ‘바라:축복’은 정식 영화 공부를 한 적이 없는 그의 세 번째 장편이다. 노르부 감독은 영국에서 수행을 하던 중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리틀 붓다’ 자문에 응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고, 장편영화 데뷔작 ‘컵’(1999)으로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을 받았다. ‘바라:축복’의 촬영장 사진에서 그는 승복 대신 티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채 연출을 하고 있었다. 노르부 감독의 궁극적인 소망은 “부처의 일생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