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국방부의 히딩크'였다는… 열정의 지휘자 배종훈씨

배종훈(50)씨를 만난 것은 탈북 청소년을 돕기 위한 '뷰티플 드림 콘서트'에서 그가 또 무보수 지휘를 맡았기 때문이다.이번이 세 번째다. 일반 연주회라면 그의 객원 지휘료는 1000만원쯤 된다고 한다.

지휘자와는 '음악적 얘기'를 해야 할 텐데, 그와 관계되는 단어는 '국군교향악단' '항공모함 미드웨이호 선상 연주' '유엔 참전 용사' '탈북 청소년' '한반도 평화' 같은 '비음악적인' 것들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특이한 것은 틀림없다.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다가 2009년 초 잠깐 귀국했을 때다. 나를 후원해주던 H 기업의 I 회장과 K 전 장관 등과 함께하는 저녁 자리가 마련됐다. 이분들이 '우리 문화예술계가 너무 한쪽으로 쏠려있다. 으레 '개똥철학'을 내세워야 예술가인 것처럼 됐다. 배 감독 당신만이라도 국가와 공익을 위해 활동해달라'고 했을 때, 나도 동감을 표시했다."

―음악이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나?

"물론 그때만 해도 한국 사회가 이렇게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지 어떤지 전혀 물정을 몰랐다. 베토벤은 '내가 뭔가 가졌을 때 힘들고 배고픈 사람을 위해 쓰지 않으면 죄'라고 말했다. 나도 젊은 날 음악 자체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예술의 공익적 역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내 음악이 조금이라도 사회를 아름답게 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서 '공익'을 위한 그의 국내 데뷔 무대가 마련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사랑의 음악회'에서 그가 KBS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기로 한 것이다.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취지였다.

"음악회 날짜는 5월 23일이었다. 바로 그날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한 것이다. 이미 예정된 음악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옥신각신하다가 음악회는 약식으로 진행됐다. 나는 지휘를 취소했고, 이 대통령도 불참했다."

그의 국내 데뷔는 몇 달 뒤 예술의전당에서 파독(派獨) 광부·간호사들을 초청한 연주회에서 이뤄졌다.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 날은 그해 10월 24일 '유엔데이'였다. 그가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유엔 참전 용사 추모 음악회'를 개최한 것이다. 관객 6000여명이 운집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미군 하사의 무용담을 토대로 한 '인천'이라는 곡을 그는 지휘했다. 인천 앞바다의 파도소리로 시작돼 헬기와 군함의 폭격음으로 점점 격해지고 후반부에는 플루트의 선율로 끝났다. 음악회는 끝났지만 그에게는 '공익 지휘자'를 향한 출발이었다.

"당시 정부는 음악계로부터 '국립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달라'는 요구와 압력을 받고 있었다. 유인촌 문화부장관은 '이를 만들려면 예산이 800억원 든다'며 고민했다. 청와대와 상의해 '군에도 음대 출신의 좋은 인재가 많은데 이를 활용하자'는 묘안을 낸 것이다. 창군 이래 없었던 '국군교향악단'이 창단된 것이다."

그는 국방부로부터 '국군교향악단'의 음악감독 및 상임 지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한자리에 매인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군데 정착 못 하고 이곳저곳 떠도는 삶이었다. 부잡스럽다고 할까. 활동 무대인 미국 LA에서도 나는 지역을 옮겨가며 13번 이사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았던 시점에 재미 교포인 아내가 미 국방부 소속 문관(약사) 자격으로 용산 미8군에 발령받고서 와 있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한국에 온 의미가 이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연봉이나 대우 조건은?

"내가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나는 국가를 위한 순수한 봉사 차원에서 개런티를 전혀 안 받겠다. 둘째, 교향악단을 군악대 소속에서 벗어나 독립 편제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국군교향악단의 상임 지휘를 맡으면서 아내는 미국 국방부, 나는 한국 국방부 소속이 됐다. 우리 부부는 소위 '한미연합군'이었다."

육·해·공·해병대 전군 합동의 국군교향악단(98인조)이 만들어졌다. 국방부 안에서 그는 재킷 상의에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국방부의 히딩크가 왔다"는 말을 들었다. 장병들과 어울려 회식 자리에서 처음으로 맥주에 소주를 타 마시는 것도 배웠다.

―완전 무보수로 계약했나?

"국군교향악단이 창단될 때 군 일각에서는 '무기 살 돈도 부족한데 무슨 음악 할 돈이 있느냐'는 말이 나왔다. 악단 예산에는 '지휘료' 항목도 없었다. 내가 무보수로 한다는 말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무 부대에서는 내 통장 내역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 악단을 3년간 맡으면서 개인 돈을 2억원쯤 썼다. 후원자 그룹에서 많이 도와줬다. 내가 돈을 벌지 않아도 와이프가 나를 아직 내쫓지는 않았다."

국군교향악단은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으로 창단 공연을 했다. 손가락이 굳은 장병 단원들을 석 달간 매일 연습시켰던 것이다. 그는 이 악단을 이끌고 9박 10일간 미국 연주 투어도 했다.

"국방부 예산에서는 항공료와 개인 일비만 나온다. 단원들 숙식 비용은 내 후원 그룹을 통해 해결했다. 나의 LA 교민 후원회에서는 콘서트홀과 호텔 숙박을 맡고, 연주 경비는 금호그룹에서 도와줬다."

미국 투어 중에서 퇴역한 미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에서 열린 선상 연주회가 압권이었다. 6·25 참전 미군 용사 등을 초청한 자리였다.

"공연 사흘을 앞두고, 무대와 음향 장비를 선상으로 끌어 올릴 곤돌라와 리프트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통보가 왔다. 결국 인부 수십 명을 별도로 고용해 24시간 밤낮없이 나를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 예산은 짜여 있었다. 공연을 하느먀 마느냐, 내가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즉석에서 내 가족과 후원자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지휘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과거에 나는 단원들에게 요구만 했다. 내가 악보를 해석한 대로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내가 지휘하는 폼에 더 많이 신경을 썼다. 지휘자들은 단상(podium)에서 지휘봉을 들고 율동한다. 하지만 자신의 율동이 많을수록 연주음은 작게 들리고 단원들의 인격은 거의 안 보인다. 끝나고 나면 단원들끼리 '저 지휘자는 단상에서 춤추지만 우리는 그의 종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단상에서 춤춘다고 했는데, 연주하는 동안 지휘봉이 단원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메시지를 주나?

"악보에 대한 정보적인 면을 안내해줄 뿐이다. 사실 어떤 식으로 연주할 것인지는 리허설 때 이미 정해져 있다. 공연 때 지휘봉이란 관객들에게 연주회 상황을 풍성하게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데, 지휘자에 의해 얼마나 다른 음악이 나올 수가 있나?

"차이콥스키의 '낭만파 협주곡' 음표는 4만여개나 된다. 음표는 가이드라인이다. 한 음표마다 길게 할까 짧게 할까 밝게 할까 어둡게 할까, 그런 해석과 표현 능력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이 공연될 때 천차만별의 연극이 나오는 것과 같다. 대가(大家)가 지휘할 때를 보면 자신의 해석도 그때그때 달라져 열 번 리허설이 다 다르고 공연 때도 또 다르다."

―음악적으로 좋은 지휘자란?

"좋은 귀를 가져야 한다. 단원들이 내는 음악을 얼마나 섬세하게 듣는가, 어느 정도까지 무엇을 들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지휘자에게는 악기가 없다. 단원들이 악기다. 단원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이다. 좋은 지휘자란 세상의 지휘자와 똑같다. 미리 그 단원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이다. 나쁜 지휘자는 일이 끝난 뒤 단원들에게 '잘했느니 못했느니' 지적한다."

―배 감독은 국제 무대에서 어느 급의 지휘자에 속하는가?

"우리나라 지휘자로서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는 수준은 정명훈 선생밖에 없다. 나는 아직 멀었다. 다만 나는 무대에 서서 관객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내 지휘에는 열정과 활력이 넘친다고 한다. 내 후원자인 모 재벌 부인은 연주회에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 배, 우리는 돈과 건강이 있어 매일 밤 즐길 게 많아요. 당장 라스베이거스로 떠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나를 지겹게 하지 마세요' 하고 조크했다. 적어도 관객을 지겹게는 하지 말자는 것이 내 모토다."

―이는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이나 할 말이지, 지휘자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바그너가 멘델스존 음악회에 가서 졸다가 이마를 찧었다. 나도 다른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러 가서 존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공연 동안 팔만 흔들고 악보에만 눈이 꽂혀있는 지휘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국군교향악단을 3년간 이끌고 작년 말 물러났다. 그동안 60회쯤 연주회를 열었다.

―군대에서 클래식한 교향악단이 뿌리를 내릴 수 있던가?

"내가 맡고 있는 동안 별 하나(준장)인 교향악단 단장은 네 명이 바뀌었다. 교향악단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단장들 중에는 '배 감독, 공연 동안 의장대원들이 총을 돌리거나 여군들이 마스코트 탈을 쓴 채 율동을 하자'는 제안도 했다. 공연 연습을 마친 단원들을 불러서 '낮에 빼먹은 전투 훈련을 받아야 한다'며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재우기도 했다. 이런 문제로 내 천성에 맞지 않게 흥분하기도 했다."

―배 감독이 떠나고 난 뒤에는?

"힘들게 창단한 악단을 유지하려면 지명도 있는 분이 오셔야 될 것 같았다. 금난새 선생께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국방부의 모 차관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성가대 합창단 지휘자에게 자리를 맡겼다. 장병 단원도 98명에서 60명으로 줄였다. 군에서는 음악적 재능들을 다 썩힌다. 발레 하는 젊은이들은 군화를 신고 나면 생명이 끝난다. 문화 예술의 국가적 장래를 생각하면 '국군체육단'처럼 '국군예술단'도 만들 필요가 있다."

국군교향악단을 떠난 뒤 그는 '정전 60주년 기념 UN 참전국 교향악단 평화음악회'를 지휘했다. 그가 열정을 주체 못 해 참전 21개국 출신 연주자들에게 연락해 참여시켰다.

―이런 공익 행사에 열정을 쏟으면 음악 애호가나 음악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가를 받지 못할 텐데.

"나를 아끼는 분 중에는 '제발 행사 좀 그만해라'고 말한다. 얼마 전 로마심포니의 객원 지휘자를 맡았다. 하지만 공익 음악회도 예술적 열정과 깊이를 얼마나 담아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겠나."

오는 16일 밤 8시 예술의전당에서 그의 뷰티풀한 지휘(뷰티플 드림 콘서트)를 무료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