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같았던 할머니 베개… 오, 예술이네

새하얀 방석은 한숨과 소망을 담는 그릇이었다. 여인들은 그 위에 야생화를 수놓으며 언젠간 못다 한 꿈이 꽃 자수처럼 만개(滿開)할 것을 믿었다. 베개는 작고 네모난 통속(通俗)의 역사였다. 남녀(男女)는 베개를 함께 베고 속삭임과 미래를 나눴고, 베개는 이들의 눈물과 땀을 몸으로 기록해왔다.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50)이 오는 27일까지 울산박물관에서 '전통, 오늘 그리고 진화'라는 전시를 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과 외국 정상회담 때 입었던 한복을 지어 화제를 모았던 그다. 이번 전시는 문화체육관광부·울산광역시가 주최한 '한복 페스티벌'의 일부지만, 김씨는 한복이라는 틀에 갇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9일 만난 김영석은 "나는 한복장이를 넘어 한국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한복을 짓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우리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말하고 알리는 것이다. 사극이나 영화 속에서만 보는 아득한 옛날의 전통이 아닌,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가 쓰다듬고 만졌던 우리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베개·노리개, 그 내밀함

전시의 시작은 베개다. 김영석 디자이너는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는 우리 물건이 뭘까' 생각했다. 그 답이 베개였다"고 말했다. 그는 비단으로 감싼 네모난 목침(木枕) 속에 우리의 은밀한 일상사(microhistory)가 농축돼 있다고 믿었고,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베개를 수집했다. 그리고 그중 1000개를 골라 나란히 쌓아 올렸다. 김씨는 "차곡차곡 포개진 1000개의 베개에서 농밀한 근대의 추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베개가 백년해로의 꿈이라면, 노리개는 여인네의 '백사여의(百事如意·모든 일이 뜻대로 됨)'를 향한 갈망을 담아낸 작은 가보(家寶)다. 노리개엔 부(富)와 다산(多産)의 소망이 얽혀 있다. 전시 방식도 흥미롭다. 김씨는 한복을 입힌 마네킹 8개에 빛깔과 모양이 각기 다른 노리개를 달고 한지(韓紙)를 위아래로 덧댔다. 그 결과 마네킹의 얼굴과 치맛자락은 가리고 저고리와 노리개만 보이도록 했다. "노리개만 죽 늘어놓고 유물처럼 보여주는 게 아닌, 여인네가 입은 모습과 그 생활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치 누가 창호 사이로 슬쩍 들여다본 것 같은 그런 풍경."

◇오래된 미래…책가도와 방석

김영석 디자이너는 전시 전체를 8폭 병풍을 활짝 펼쳐놓은 것처럼 꾸며놓았다. 그리고 그중 '책가도(�架圖)' 그림을 병풍 밖으로 끄집어냈다. 책, 부채, 향로, 도자기 등을 화재(畵材)로 삼은 우리 고유의 민화 속 풍경을 실재하는 사물로 재현한 것. 평생 모아온 고가구에 꽃과 과일, 도자기와 부채 등을 감각적으로 배치했고, 우리 근현대에 널리 읽힌 책을 세심하게 꽂고 쌓았다. 김씨는 "우리가 여전히 가까이 두고 읽는 책을 배치해 '오늘의 지식 풍경'을 함축해보려 했다"고 했다.

책가도가 우리 시대 지식의 화첩이라면, 새하얀 방석은 부족할 것 하나 없이 가득 찬 삶을 꿈꿨던 서민들의 도화지다. 김영석은 한 땀 한 땀 손으로 놓은 야생화 자수가 아로새겨진 흰 방석을 차곡차곡 쌓고 또 펼쳐놓았다. "충만한 자연의 힘을 빌려서라도 풍요로워지고 싶은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열망과 욕망의 꼭대기엔 족두리가 있다. 밀화(호박)·비취·산호·진주 같은 보석을 박아넣었던 족두리를 머리에 쓰면서 여인들은 삶의 완성과 가장 빛나는 순간을 꿈꿨다. 김영석은 그동안 수집하거나 손수 만든 족두리 100개를 전시장 한쪽에 늘어놓았다. 전통적인 족두리 외에도 새하얀 바탕에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사파이어를 써서 만든 현대 예식을 위한 족두리도 있다. "전통은 고여 있지 않고 그렇게 흘러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문의 (052) 222-8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