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 따라 어머니는 눈물을, 그는 글을 심었다

가을 바다에 찰랑이는 물비늘이 눈부시다. 12일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5주기를 맞은 작가 이청준(1939~2008)의 '눈길'을 걷는다. '눈길'은 소년 이청준이 책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회진 초등학교까지 뛰어다녔다던 왕복 16㎞의 산길이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문학으로 형상화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 집이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겨울 방학 맞아 부랴부랴 고향으로 돌아온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 이미 남의 집이 된 옛집. 이 사실을 숨기고 아들과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이른 새벽에 아들을 떠나보내고 그 아들의 눈길 발자국을 밟으며 돌아오는 어머니….

"오목오목 디뎌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고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잘 살거라."

이청준 '글길'의 수원지(水源地)였던 이 '눈길'을, 고향과 외지의 문우(文友)·후배·제자·유족 40여 명이 따라 걸었다. 장흥의 문학동인회 '장흥별곡'의 김석중 회장이 목청을 높였고, 서울에서 내려온 시인 김형영·감태준·김영남, 고려대 정문길 명예교수, 소설가 백민석, 문학평론가 서강대 우찬제 교수, 열화당 이기웅 대표, 문학과지성사 주일우 대표 등이 뒤를 따른다. 고인이 10년간 석좌교수로 있었던 순천대 문예창작과 학생들과, 인하대 국문과에 유학 온 중국인 대학원생들도 가을볕에 땀을 흘린다. 문학과지성사의 '이청준 전집' 편찬위원인 홍정선 인하대 교수 제자들이다.

다리가 불편한 이청준 기념사업회장 김병익(75) 고문은 마을 어귀에 남았다. 그는 "비록 자기 고향이라 하더라도 한 작가가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하고 조화로운 추모의 자리를 갖는 건 참 드문 일이고, 이런 자리는 이청준 아니면 볼 수 없는 일"이라며 "제가 이청준의 친구였다는 것, 그 인연으로 기념사업회장이라는 직책까지 맡았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고 했다.

추모의 자리는 전날부터 계속됐다. 원래 작가의 기일은 7월 31일. 기제사와 추모 행사를 폭염 속에 함께 치르다, 장흥군과 기념사업회가 3년 전부터 추모 행사만을 10월의 좋은 날로 분리한 것이다. 전날 순천대에서는 작가의 사진 50여점과 '당신들의 천국' '눈길' 등의 육필 원고를 전시하는 기념전이 개막했고, 저녁때 장흥군민회관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소설극, 노래 공연, 특강 등이 이어졌다. 고인과 동향인 동갑내기 작가 한승원(74)은 "좋아하던 농어회 앞에 놓고 미백(未白·고인의 호)과 소주 한잔 마시고 싶다"고 했고, 순천대 문창과 안광 교수는 형편 어려운 제자들을 위해 학기마다 사비를 털었던 석좌교수 시절의 고인을 추억했다.

작가와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던 평생 지기 민득영 한양대 의대 명예교수는 고인의 호가 미백이 된 이유를 알려줬다. 머리가 허옇게 된 이청준을 보고 노년의 모친이 "오메, 내 자석 머리가 이렇게 히어부렸다녀" 하시니, 아들은 웃으며 "아직도 이렇게 검구만이라우" 하며 이미 희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는 것이다. "희지 않다"는 의미의 미백은 이렇게 탄생했다.

'눈길'에서 걸어 5분이면 미백의 묘소가 있다. 마지막에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아들조차 못 알아봤다는, 미백이 그렇게 사랑했다는 어머니. 모자(母子)가 함께 누워 있었다. 눈높이에 펼쳐진 장흥 바다가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