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洋 앞에서 작아진 우리의 자화상

황금빛 사원(寺院), 동남아 특유의 울긋불긋한 색채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전시장은 유럽의 미술관 같다. 엄숙한 17세기 바로크풍 회화가 고급스러운 붉은 벽에 묵직하게 걸려 있다.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는 태국 작가 나티 우타릿(43) 개인전 '우스꽝스러운 낙천주의'다.

스페인 바로크 거장 벨라스케스 작품을 연상시키는 난쟁이 그림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유럽풍 깃털 모자를 쓰고, 흰 목 깃이 돋보이는 푸른 옷을 입고, 허리에 장검을 찬 채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그림 밖을 응시하는 이 난쟁이는 어깨에 우리 눈에 익숙한 가방을 메고 있다. 동양 여성들이 소위 '색깔별'로 장만한다는 프랑스 브랜드 '롱샴'이다. 작품 제목은 '우리는 아시아(We are Asia)'. "동남아인은 강렬하고, 과감하고, 때론 폭력적이지만 그래 보았자 서구의 눈에는 기껏해야 '난쟁이'일 뿐이다. 그게 21세기 동남아의 현실이다."

동남아 국가 대부분이 서구의 식민지 통치를 겪거나 외세의 영향을 아직도 겪고 있다. 드물게 식민지 경험이 없는 태국도 예외는 아니다. 자학적이고, 염세적으로 그려낸 동남아의 '슬픈 자화상'이 이번 전시의 주제인 셈이다.

17세기 네덜란드 그림을 상기시키는 정물화엔 수퍼마켓에서 사온 싸구려 통조림, 물병 등이 놓였다. 네덜란드 옛 정물화에 놓인 사물은 원래 유한한 인생을 경계하라는 '장치'지만 작가는 대량생산의 결과물들을 놓아 서구의 '유구한 전통'을 은근히 비꼬았다. 서구를 비판하면서도 서구 전통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동남아 작가의 아이러니.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태국 미술대학의 서양화 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탈리아 교육과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서구 아카데미의 기초인 정물화에서 시작해 초상화, 역사화를 연마하는 건 내겐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02)2287-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