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색깔은 빨강과 초록이다. 얼핏 병원이나 약국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國旗)를 거리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선명한 원색은 알프스를 덮은 초록과 대비되어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취리히에서 비행기를 내려 빨간색 관광열차를 타고 푸른 초원을 달리면 창밖으로 그림 같은 경치가 펼쳐진다. 나지막한 언덕이나 산등성이에 오두막 몇 채가 자리 잡은 풍경으로, 아무 데나 대고 셔터를 눌러도 '사진'이 된다. 완만한 언덕배기에 간혹 모습을 보이는 소나 양 떼는 그 드넓은 초원을 거닐며 '호강'을 하고 있었다. 달력이나 잡지에서만 보던 풍경에 반가운 마음으로 기차 창문을 열자 웬걸, 소똥 냄새가 확 들어왔다. 그림 같은 풍경을 가득 채운 소똥 냄새라니! 그 냄새는 산골 마을도 뒤덮고 있었다.
① 여름 동안 알프스에서 목축을 하고 치즈를 만든 목동들이 양·소떼를 몰고 산 아래 아펜첼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② 벽면에 원색 계열로 그림을 그린 아펜첼의 건물들. ③ 호숫가에 자리한 루체른. 왼쪽에 카펠교와 팔각형 탑이 보인다. / 스위스관광청 제공
◇아펜첼: 목동들의 '소 떼 몰이 축제'
스위스 동북부에 자리한 아펜첼은 스위스의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 꼽힌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선 2~3층 집 벽면에 하얀색과 빨강, 파랑 등 원색 계열을 사용한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려놓아 동화 속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알프스의 산골 마을답게 목동들의 전통 풍습도 남아있다. 산등성이에 풀이 자라는 데 맞춰 매년 5~6월쯤 소를 몰고 산으로 올라가 여름 내내 치즈를 만들고 8~9월쯤 마을로 내려오는 목동들의 소몰이 축제는 일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다. 빨강과 노랑으로 이루어진 전통 의상을 입은 어린이들과 염소들이 앞장을 서고, 커다란 쇠방울을 단 수백 마리의 소들이 목동들과 함께 긴 행렬을 이루며 산기슭을 내려온다. 현지 가이드는 "커다란 쇠방울은 원래 초원에 흩어져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어디에 있는가 목동들이 알기 위해 달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아펜첼 뒤편에 있는 호어카스텐산(1794m) 정상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면 계곡에 들어선 목동들의 오두막과 방목하는 소·양 떼를 발견할 수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광장에서는 매년 4월 주민들이 모여 주요 현안을 거수(擧手) 투표로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인 란츠게마인데(Landsgemeinde) 제도가 남아있다. 투표에는 원래 18세 이상 성인 남자만 참여할 수 있었는데, 199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성의 투표가 허락될 정도로 보수적인 측면도 남아있다.
동네 전통 공방에서는 망치와 톱 등 간단한 도구를 이용해 각종 가죽, 철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구경할 수 있다. 가죽에 소 모양의 금속공예 장식을 넣어 만든 혁대 등이 유명하다. 알프스에서 나는 40여종의 허브를 넣어 만든 약술은 동네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데, 한약 비슷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스위스 3대 치즈로 불리는 '아펜첼러'는 향이 강한 걸로 유명하다.
◇루체른: 호수의 도시
스위스 중부에 있는 루체른은 호수의 도시다. 바다 같은 호수를 낀 구(舊) 시가지에는 중세풍 건물들이 남아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로이스강에 놓인 카펠교는 14세기에 만들어진 유럽 최초의 목조다리(길이 280m). 나무 다리 위에 지붕을 얹어놓고 그 지붕에 17세기 화가 하인리히 베그만이 루체른의 역사 등을 그린 작품으로 장식했다. 다리는 꽃으로 장식해 호수의 아기자기한 풍경과 잘 어울린다. 다리 중간의 팔각형 탑은 예전에 망을 보던 곳이라고 한다. 강변 카페에 앉아 있으면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루체른 호수를 가로지르는 증기 유람선을 구경할 수 있다.
'빈사(瀕死)의 사자상'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호하다가 죽어간 700여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조각상이다. 자연 암벽을 조각해 만든 부조상으로, 쓰러져 죽어가는 사자의 슬픈 눈동자가 발길을 붙잡는다.
구 시가지에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상점과 부티크, 레스토랑이 모여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무제크 성벽에 이른다. 돌벽으로 이어진 성벽이 시내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데, 현재 900여m 남아있다. 성벽에는 9개 탑이 남아있고, 가장 높은 만리탑에 오르면 시내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루체른 주변에는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산들이 많아 하이킹을 즐기기에 좋다. 알프스 하이킹은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 부근에 올라 산 아래로 내려오는 코스가 많다. 대표적인 산은 용이 산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필라투스(Pilatus·2132m), 만년설로 뒤덮인 티틀리스(Titlis·3020m), '산들의 여왕'으로 불리는 리기(Rigi·1801m)산 등. 하얀 만년설 아래 펼쳐진 호수와 중세풍의 고성(古城), 루체른에는 현대 도시와는 다른 종류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여행 수첩
대한항공이 인천공항~취리히 직항 노선을 매주 화·목·토요일 운항한다. 아펜첼에 가려면 취리히에서 기차 타고 고사우역을 경유해 1시간 50분 정도 달리면 된다.
●스위스패스: 험준한 산과 계곡이 많은 스위스에서 기차는 가장 인기 있는 교통수단이다. 스위스패스는 스위스 전역의 거의 모든 기차와 버스, 보트, 도시 교통수단을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는 패스. 박물관·케이블카 등도 무료 또는 반값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가격은 기간(4일, 8일, 15일 등)에 따라 다르다. www.swisstravelsystem.com, www.raileurop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