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포커스] 5년째, 내 월급은 멈춰있다

새 정부의 재정정책이 난항을 겪고 있다. 세제 개편안은 근로자들의 거센 반발로 한 걸음 물러났고 핵심 복지 공약은 줄줄이 후퇴하고 있다. 세금 증가에 대해 국민은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고, 저성장 때문에 복지재원 마련은 한층 힘들어졌다. 정책 환경이 과거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성장도, 복지도, 세원 확대도, 마치 벽에 갇힌 듯 한계에 도달한 느낌이다. 어쩌다가 그런 딱한 처지에 빠졌는지 근본부터 살펴봐야 한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데는 정체된 실질임금과 과다한 기업 저축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월급봉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실질임금'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부터 올해 1분기까지 계속 정체돼 있다.

벌써 5년째 '임금(賃金)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실질임금이 늘어나지 못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임금 없는 성장'이 문제인가?

실질임금이 늘어나지 않으니 소비가 늘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질임금 정체로 인건비를 절약한 기업들은 투자는 않고 저축만 하고 있으니 경제가 성장하지 못한다. 실질임금이 정체되면 근로자들의 생활수준은 나아지지 못한다. 본인은 열심히 했는데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으면 누구라도 내심 불만이 생긴다. 자기들이 창출한 부(富) 가운데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심 섞인 불만이다. 지금 수많은 근로자는 IMF 외환위기 때보다도 훨씬 더 긴 세월을 답답해하며 보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난데없이 불쑥 세금 부담을 늘리겠다고 했으니 거센 반발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실질임금이 5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배당소득도 완전히 정체됐고, 자영업 소득과 이자소득은 벌써 10여년째 거의 늘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가 증가하려면 저축을 줄이거나 부채를 늘려야 하지만 가계 저축률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추락한 지 오래여서 더 이상 줄이기 어렵고, 가계 부채는 위험 수준을 넘어 날로 불어나고 있어 빚을 더 내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소비 위축, 저축률 하락, 가계 부채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려면 결국 가계소득이 더 활발하게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실질임금이 정체돼 해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물이 차오르면 모든 배가 떠오르듯이 성장률만 높아지면 '임금 없는 성장'이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임금 없는 성장'에는 뜻밖에도 인구 고령화라는 구조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젊은 근로자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임금이 가장 높은 40대 비중이 점점 높아지면서 일인당 임금도 자동적으로 증가해 왔다. 그런데 40대 근로자들이 50대로, 50대가 60대로 넘어가면서 2011년부터는 일인당 임금이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어드는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앞으로 고령화가 심각해질수록 '임금 없는 성장'의 해소는 더욱 어려워진다.

◇고령화 시대, 기업은 저축만 늘려

임금이 생산성을 못 따라가는 '임금 없는 성장'은 기업에는 인건비 절약으로 이윤을 높일 절호의 기회다. 실제로 지난 5년간 인건비는 매출액 대비로 대폭 줄어들었고, 대내외적 경제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기업 소득은 위기 이전보다 더 빨리 증가했다.

이와 함께 기업 저축률도 2003~2007년 평균 15.5%에서 2009~2012년에는 평균 19.0%로 증가했다. 2006년만 하더라도 비교 가능한 OECD 25개국 가운데 12위였던 우리나라 기업 저축률은 2008년을 거치며 7위로 올라섰고 2009~2010년에는 일본에 이은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임금소득, 배당, 이자 등 가계의 주요 소득원이 모두 기업 저축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에 낙수 효과(落水效果)가 갑자기 실종된 이유다.

◇'임금 없는 성장' 해법은?

너무 많은 가계가 너무 많이 저축을 할 경우 경제 전체에 침체를 초래한다는 '저축의 역설'처럼, 선진국 중 2위라는 과다한 기업 저축으로 활력을 잃어버린 현재의 우리 경제의 모습은 '기업 저축의 역설'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해 보인다.

그렇다고 기업에 임금을 올려주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기업이 그 말을 들을 리도 없다. 해법은 기업 저축이 지나치게 늘어날 인센티브를 없애는 것이다. 소비가 침체되었을 때 개인의 저축 인센티브를 줄이는 금리 인하가 당연한 정책인 것처럼, 과다한 기업 저축으로 투자가 말라붙고 가계의 소득원이 고갈되어 경제가 활력을 상실했을 때 기업 저축의 인센티브를 줄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정책이다.

예컨대 현재 기업 금융소득에 대한 최고 세율은 법인세 최고세율인 22%인데 이것을 개인의 금융소득 최고세율인 38%로 맞추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기업들이 저축을 굴려 얻는 금융소득을 제조·판매 수익으로부터 분리해서 각각에 대해 별도의 세율로 과세하는 것이다.

기업으로 하여금 저축보다는 투자와 이노베이션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개인이 내는 세율과 동일하니 이를 두고 징벌적 세율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 세율을 영구적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 기업들이 지나친 저축을 자제하여 더 이상 저축의 주체가 아니라 투자의 주체라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바꾸자는 얘기다.

과도한 기업 저축을 억제하고 '임금 없는 성장'을 해소하는 큰 틀의 패러다임 전환 없이 우리 경제가 저성장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실질임금

실질임금이란 손에 쥐는 월급에서 물가 상승분을 뺀 임금의 실질적 가치를 뜻한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하는 명목임금을 소비자물가지수로 나눠 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