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위관료 출신이었다. 서울 교외 한적한 마을에 손수 전원주택을 짓고 유유자적했으나 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는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겼고, 60평생 살면서 알고 지낸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거처와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죽마고우들조차 자식을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현재로부터 완벽하게 실종상태였다. 누구보다 화려했던 과거를 그는 왜 지우려 했을까.
“세상에서 누릴 건 다 누려 보았지만, 돌이켜보니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세상이 만든 잣대에 자로 잰 듯이 살아왔다. 모든 인연을 끊고 ‘나’로 다시 태어나 살다 가려 한다.”
그가 그렇게 사는 이유였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로망이 아닌 현실이 되었지만, 약 20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을 벗어나 교외 전원주택에 살려면 돈키호테 같은 용기가 필요했다. 전원주택 칼럼을 쓰면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90년대 중반 무렵, 그를 만났다.
천안에서 한참을 내려간 시골에서 작은 과수원을 하던 이도 그랬다. 세탁소를 하면서 4남매를 다 키우고 나서 ‘내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자식들에게 선언하고 탈속을 감행했다.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자식들도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하고 많은 인연을 모두 끊은 것은 물론이다.
그때는 그래야 했다. 그들보다 3∼4년 늦었지만, 그 무렵 전원생활을 시작했던 필자는 동물원 원숭이 보러 오듯이 밀려드는 객들을 대접하느라 1년이면 돼지 서너 마리를 숯불에 흠향해야만 했다. 손님 접대에 지칠 대로 지친 집사람이 한번은 손님이 오는 날 집을 나가버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외눈박이 취급을 받았던 전원생활이 20년에 이르고 보니 겪을 만큼 겪고, 알 만큼 알게 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그래도 내가 인생에서 이거 하나는 건졌구나!’라는 것. 필자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양평 시골 마을로 내려갔다.
한 학년에 한 학급뿐인 초등학교를 나와 시골학교만 맴돌다가 어느덧 군대 가고, 대학생이 된 아이들은 ‘아빠, 엄마에게 가장 감사하는 일’로 그런 시골에서 키워준 것을 꼽는다. 철이 드니 그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알겠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대학생이 되고부터 어느 순간 서울에서만 자란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더라고 한다.
그들이 갖지 못했지만, 무척 부러워하는 것, 그 ‘다름’이 바로 몸속의 ‘촌놈 DNA’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아직도 엄마, 아빠가 나서는 길이면 두말없이 자리를 털고 따라 나선다. 간혹 친구들과 부부동반 모임이 있을 때 우리 아이들만 동석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그게 자연스러운데 친구들은 마냥 신기하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컸다. 다만 ‘집’이 다를 뿐인데.
필자와 같은 마을에서 화실을 열고 있던 화가 선생님은 서울 한복판에서 시골 마을로 화실을 옮긴 계기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미술학원을 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만 보고도 그 아이가 단독주택에 사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표현 방법, 색감의 차이 그런 게 확연하게 드러나는 걸 보고 깨달았죠. 서울 한복판에서도 이런 데 시골집과 서울 아파트는 얼마나 또 다를까.”
윈스턴 처칠이 그랬다고 한다. ‘인간은 집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 집이 사람을 만든다’고.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아파트를 많이 짓는 어떤 건설업체가 이런 광고를 한 적이 있다.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는 목가적 농촌 들녘이 액자 속의 그림으로 화면 가득히 등장하더니 서서히 줌 아웃이 되면서 그림은 거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으로 변한다. 그리고 잔잔하게 흐르는 카피….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집이 있었기에 자연주의 화가 밀레가 탄생했을지 모릅니다. 집이 사람을 만듭니다.”
한 편의 서정시처럼 참 잘 만든 광고였다. 그러나 그 광고가 주장하는 궁극적인 메시지의 ‘기막힌 역설’에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작 그 회사는 그런 집을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이 사람을 만든다고! 그런 집에서?’ 그게 아니라는 것은 아파트문화의 중심지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안다. 강남의 신흥 재력가로 한창 잘나가던 그가 주말주택을 상담하면서 털어놓은 얘기는 이랬다.
“내가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지. 흙속에서 뒹굴며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촌놈의 뒷심이 없었다면…. 그런데 맨날 게임기만 끼고 살고, 지하철도 혼자 탈 줄 모르는 아들 녀석이 자수성가는 고사하고 내가 이룬 것을 제대로 지켜내기나 할까?”
그래서 주말만이라도 아들과 함께 흙 속에서 뒹굴고 싶었다고 한다. 한때는 ‘놀이 과외’를 시켰다. 체육학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한강 둔치로 데려가서 일정 시간 마음대로 뛰놀게 하고는 집에 데려다 주는 ‘시골놀이’ 과외였다. 그런 것조차 과외를 통해 해결했다는 말을 듣고 ‘과연 강남’이라고 탄복했다.
그는 그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강남에서 1시간 거리에 조그만 주말주택을 장만하고 ‘포서드(Four-Thirds) 族(평일 4일은 서울, 주말 3일은 시골 주택에서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들)’으로 산다. 현실과의 타협이다.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전원주택으로 선뜻 옮겨가지 못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들이대는 것이 아이들의 '교육문제' 이다.
필자는 바로 그 '교육문제' 때문에 시골로 내려갔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매일 내주는 숙제가 맨날 뭔가를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1학년짜리가 제 손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들로. 결국은 우리 부부가 밤늦게까지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모회에 나갔던 집사람이 그런 하소연을 하다가 핀잔만 듣고 왔다. 아침마다 문방구에 가면 산더미처럼 과제물이 쌓여 있는데 그것도 몰랐느냐고 하면서. 문방구에서 하룻밤에 그 많은 물건을 다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며칠 전에 발주하지 않았다면.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싫었다.
시골생활은 아이보다 부모에게 많은 불편과 희생을 강요한다. 지금까지 전원에 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거듭 확인한 것은, 부모들이 걱정하는 그런 것들에 정작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모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건 있다.
그만큼 부모들이 성가신 일도 많다. 서울에서는 돈으로 해결되던 모든 일이 부모의 수고를 통해야 해결된다. 그게 시골생활이다. 사실은 그걸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아이의 등 뒤에 숨은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수년간 임종 직전 환자들의 마지막을 지켰던 어떤 호스피스가 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일은 ‘내 뜻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시골집에 한번 살아 본다고 인생을 내 뜻대로 산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평생 남이 지어준 사각 틀에 갇혀 살아온 인생과는 분명 다른 세계가 그 속에는 있다.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살아야 하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상 아파트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생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 것은 비극이다. 한번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적어도 인생을 시작할 시점, 그리고 마감해야 할 시점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