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날, 남산에서 만나는…

시월이다. 시월이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생각난다. 아니 잊고 살았던 젊은 날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가슴 뛰던 애틋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열정과 도전으로 밤을 지새우던 젊음,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와 희망.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그리운 친구들과 졸업을 앞두고 다 함께 만들던 추억 록. '2000년 1월 1일 오전 10시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 '첫눈 내리는 날 명동에서 만나자', '졸업 후 10년 뒤에 다시 만나 수학여행지 경주를 다시 한 번 돌아보자' 등등.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룬 것은 없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만 남는다. 그래서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픈 것인가? 헤어진 사람이 더욱 그립고, 지나간 세월이 더욱 아쉽고 분명히 열심히 살아왔고 최선을 다했건만 자신 없이 고개 숙인 내 모습.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잊혀야 하는 현실이 못내 서럽고 슬퍼지기 쉬운 중년이다.
 
젊은 날의 나에게 왠지 미안해지는 시월이다. 무덥던 여름도 물러가고 만산홍엽(萬山紅葉)의 가을이 찾아와 전국을 물들이는 가을. 이제 이 가을도 낙엽으로 안녕을 고하며 혹한의 겨울이 다가올 터인데 해마다 시월의 마지막 날만 되면 남산에서 만나는 한 무리의 중년들이 있다.

해마다 시월의 마지막 날 밤에 남산 팔각정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지난 2001년부터 시작하여 올해로 14년째 이어지는 전통이다. 앞으로 누군가 마지막 살아남을 때까지 올라갈 남산이다. 각자의 수단으로 걸어서 또는 셔틀버스로, 케이블카로 올라와 팔각정에서 만나는데 필수조건은 반드시 트렌치코트(일명 바바리)를 입어야 한다.

코트의 깃을 세우고 정장으로 차려입은 5060 중년의 선남선녀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남산,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배경음악으로 만나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모임이다. 식당의 입구를 들어서면 영화제에서 스타들이 그러하듯 레드카펫을 지나 포토존에 선다. 코트 차림으로 사진을 찍어 올해의 포토제닉상을 뽑기도 하고 삼삼오오 반가운 사람들과 어울려 친선촬영을 하기도 한다.

이내 실내는 밝아지고 따뜻해지며 하하 호호 즐거움과 화기로움으로 가득 찬다. 10년 넘게 이어온 만남에 대한 회상이 엉키고 설켜 '3년 전이냐 7년 전이냐?' 설왕설래. '아무개는 안 보이는구나.' '너는 젊어졌다.' '여전히 예쁘다.' 식당주인에게 양해를 구하여 '잊혀진 계절'이 반복하여 흘러나오는데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우리들의 만남은 늘 새롭다. 서로의 인사소개는 늘 설렌다.
 
몇 년 전 이 모임의 화두(話頭)는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였다. 이만큼 살고 보니 내가 이루지 못한 슬픈 꿈은 무엇인가? 저마다의 회상으로 실내는 일순 숙연해지고 콧등이 시큰해지는 이야기부터 잔잔한 미소를 자아내는 이야기까지 따뜻한 동화 한 편씩을 풀어낸다. 어느덧 창밖은 어두워지고 시월의 마지막 날, 서울 남산에서의 밤은 깊어만 간다.
 
올해는 무슨 화두로 채워질는지? 누구누구가 남산에 나타날지? 어떤 반가움, 어떤 아쉬움이 교차할는지? 치기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5060들의 시월의 마지막 날 만남.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남산에 오를 것이다.

10년 후, 20년 후에도 여전히 바바리코트를 입고 남산에서 모일 6070, 7080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