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한양답사] [1] 혜화동 골목

걸어서 한양 답사? 즉, 조선왕조 5백 년 도읍지 한양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답사하려고 한다. 물론 과거 한양의 사대문을 연하는 현재의 강북지역 위주가 될 테지만, 강남지역에도 생각보다 많은 문화유적과 관련 이야기들이 남아 있어 우리들의 관심과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어렵지 않게 문화유적을 만날 수 있고 답사하는 재미에 빠져들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답사라고 하면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과 열정, 심오한 지식과 학문적 연륜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무릇 역사나 문화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문화재나 고건축을 설명할 때에 정면 3칸에 측면 2칸, 팔작지붕에 다포식 건물이라거나 몸돌에 우주와 탱주를 새긴 삼 층 위에 노반과 복발, 앙화를 얹고 5개의 보륜을 장식한 석탑이라는 등의 복잡한 난수표 같은 설명을 줄줄 주워섬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혀 걱정할 일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과 관심,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마음의 눈과 거기에 담긴 정사(正史)는 물론 야사(野史)까지도 사랑하는 로맨틱한 마음, 그리고 비슷한 다른 것들과의 차이점을 찾아내는 관찰력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처럼 문화유산 답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특별하지 않으며 남녀노소를 구별하여 차별하지 않으며 멀리에 있지도 않고 누구나 조금씩만 다리품을 판다면 손쉽게 만날 수 있다. 문화유산은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거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 발밑에 묻혀 있을 수 있으며, 특히나 5백 년 도읍지 한양의 구석구석 우리들의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으니 지금이라도 바로 시작해볼 일이다.
 
누군가는 경주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했다지만 우리의 수도 서울, 한양이야말로 지붕도 없고 울타리도 없는 최고의 박물관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필자는 발 닿는 데까지, 힘닿는 데까지 걸어서 한양답사를 꾸려 나갈 생각이며 그 첫 순서로 혜화동 골목길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지금은 없어진 혜화 고가, 그 아래로 둥글게 로터리가 생겼는데 바로 그 자리부터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까지 불과 2Km 남짓한 거리를 둘러보는 이야기이다.
 
걸어서 한양답사… 혜화동 골목
 
답사는 혜화로터리 혜화성당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일요일 낮이면 필리핀 사람들이 모여서 난장을 이루는 소위 '리틀 마닐라'가 생기는 곳인데 평일이라 그런지 조용하고 한산하다. 성당 옆은 동성 중고등학교, 그 너머는 가톨릭대학교이다.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를 살펴본 후 건널목을 건너 혜화동 길로 들어선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2차선 도로 좌우로는 서민적이며 소박한 상점들과 함께 대학로에 넘쳐나는 소극장들이 이곳까지 밀려나와 여기저기 공연장이 보인다.

주민 센터를 지나면 왼쪽으로 '장면가옥'이 보인다. 등록문화재 제37호 '장면가옥'은 제1공화국에서 부통령과 국무총리, 제2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운석 장면 선생이 동성 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 시 건립하여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하였던 곳으로 근대 정치사에서 중요한 장소이며, 그의 처남인 건축가 김정희가 설계하여 1937년에 한국, 일본, 서양식 주거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여기서 등록문화재란 국가나 시‧도 지정 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이 지난 것 중 보존과 활용이 필요하여 특별히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필요 시 50년이 안 되어도 등록 가능) 즉, 대략 구한말 개화기부터 6·25전쟁 전후 기간 즈음의 유물인 '근대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다.

장면 가옥 내부를 둘러보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88올림픽을 기념하여 지은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이 나오는데 과거 보성고등학교가 있다가 강남으로 이사 간 후에 생긴 주민 복지시설이다. 그런데 이 근처가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는 송동(宋洞)이라 불리던 곳이니 바로 우암 송시열의 집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며 지금도 그때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어 이를 찾아보기 위해 들른 것이다. 우암 송시열 집터를 표시한 표석은 2곳에 남아 있다.

두 표석 사이에는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이 보였는데 '흥덕사 터' 표석과 하마비였다. 태조가 태종 때에 이곳에 흥덕사를 창건했는데 연산군 때에 없어졌다는 설명이며 그렇다면 조선 초기 이곳은 흥덕사라는 절이 있었다가 없어진 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는 송시열의 집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 때에 이르러는 명성황후의 환궁(還宮)을 점쳐주어 유명해지고 권세가 주어진 무당이 세웠다는 북묘(北廟)가 겹쳐지는 그러한 지역으로 보인다. 또한, 이 하마비는 그때쯤 세워진 것일듯싶다.

이 두 곳의 표시석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아쉽게도 송시열의 집이 남아 있거나 명확한 집터는 없다. 다만 커다란 바위에 송시열이 새겼다는 글씨 '曾朱壁立(증주벽립)'이 남아 있어 그때의 흔적을 새겨볼 수 있다. 유교의 성현인 증자와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받들겠다는 의지를 새긴 송시열의 글씨이다. 그때는 풍광 좋은 산자락에 멋진 바위였을 테지만 지금은 5층 연립이 우뚝 올라선 축대가 되고 말았다.

이곳뿐 아니라 올림픽 국민 생활관 뒤에 위치한 서울과학고 안에도 송시열 글씨가 있다 해서 찾아보았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예지관 본관을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지대가 높아지면서 오른쪽으로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는데 이름 하여 천 년 바위, 천재암(千載巖)이라 이름 붙였다. 이 바위에 송시열이 친필로 금고일반(今古一般: 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글씨와, 시를 읊는 바위라는 영반(永磐)글씨가 새겨져 있고 설명 표석이 세워져 있다.

놀멍쉬멍 중간에 간식도 하며 쉬기도 하면서 세상 구경하듯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드나들며 답사했다. 많은 비용이나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고, 지하철 타고 가서 두어 시간 돌아보는 방식이다. 하늘 좋은 가을날, 잠시 시간 내어 산책 삼아 다니기 좋은 코스이다. 혜화동 바로 옆 성균관 대학교에 명륜당도 있고, 서울과학고 넘어 성북동 쪽에도 딱 이만큼 돌아볼 곳이 있다. 다음 이야기에서 풀어보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