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장독대

창가에 서면 장 냄새가 난다. 된장 냄새가 나기도 하고 고추장 냄새가 나기도 하고 막장 냄새도 났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면 냄새나는 걸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앙증맞은 장항아리 뚜껑을 열면 색깔 고운 한지로 덮여 있는 틈새로 장 냄새가 제법 방 안 가득 풍기며 고향 장독대가 생각나곤 한다.
 
지난 추석에 아는 분이 먹으라고 무언가 보내왔다. 얼핏 보면 음료수인 것 같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으려고 개봉을 했더니, 뜻밖에도 앙증맞은, 옛날 작은 꿀항아리 만 한 장독이 세 개가 나오면서 방안 가득 장 냄새를 풍기며 나를 옛 고향으로 데리고 갔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는 잘사는 집이나 못 사는 집이나 집에 장독대가 있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당 한쪽에 장독대가 있었다. 그 장독대에 올라서서 풋내 나는 고추장을 찍어 먹기도 하고, 까치발을 하고 간장항아리를 들여다보면 연둣빛 잎새가, 흘러가는 구름이, 하늘이 들어와 앉아 놀고 있었다. 때로는 그 위로 새도 날아다니고 비행기도 날았다.
 
우리 집 장독대는 늘 반짝거리게 닦여 있었다. 옛날에는 혼삿말이 오고 갈 때도 그 집에 장독대를 보고 그 집의 규모와 가풍을 짐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어머니는 장독대만큼은 늘 반짝거리게 닦아 놓았고, 아버지 친척들이 오시면 어머니가 안 계심에도 불구하고 장독대를 기웃대며 장뚜껑을 이리저리 열어보는 이상한 진풍경도 벌어지곤 했다. 훗날에서야 그것이 시집살이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옛 문헌에 보면 장독대는 아침 해의 정기를 잘 받을 수 있는 동쪽이어야 하고 서쪽이나 북쪽은 불길하다하여 금기시 되었다고 한다. 장독대 주변에는 기를 돋우는 부추를 심고, 향기로운 냄새가 스며들게 국화를 심기도 하고, 채송화나 맨드라미를 심어 개나 고양이가 다리 들고 방뇨를 못 하게 막았다 하니 우리 옛사람들이 얼마나 장독대를 사랑했는지 알만하다.
 
그러니 장독대는 자연히 그 집안의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장맛이 좋으면 그 집안이 흥하고 장맛이 시거나 부글거리고 뒤집히면 집 안이 망한다고 했다. 밤이면 정화수를 떠 놓고 집 떠난 님이나, 혹은 자식들을 위해 칠성님께 기도까지 드리는 장소였으니, 아낙네들이 장을 담글 때 금줄 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윤이 나도록 반짝거리게 닦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파트가 보편화 되고 공기가 오염이 되다 보니 집에서 장을 담근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나도 결혼하고 살림을 시작했을 때 고추장을, 된장을 담가 보았지만 아파트 베란다 안에선 부글거리기 일쑤요, 누구 말마따나 소주를 섞어하면 된다고 하길레 그리도 해보고, 냉장고 안에서 익혀도 보았지만 그 옛날 맑은 바람과 따스한 봄볕 아래 익어가던 장맛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슈퍼나 마트에 가 된장 고추장을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 수 없는 것. 내 고향에서만 먹었던 막장을 서울로 떠난 후로는 먹을 수가 없어 늘 아쉬웠는데 창가에 놓여있는 작은 항아리들이, 아까워 아직 한 수저 퍼 먹지도 못 한 저 작은 장항아리가 창틀 위에서 내게 계속 속삭여 온다. 내년 봄에는 막장을 담가 보라고. 나처럼 작은 항아리에 조금만 담가 보라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