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현식 미공개 遺作 9곡, 23년 만에 음반으로

생전의 김현식(1958~1990)은 새 노래를 작곡하면 통기타 반주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 이 테이프를 제작자와 함께 들으며 새 음반에 넣을 곡들을 골랐다. 그가 살아서 발표한 앨범 다섯 장은 모두 이런 절차를 거쳐 녹음됐다. 그는 간경화로 죽기 직전까지 이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미처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지 못 한 9곡의 미공개 유작(遺作)이 23년 만에 음반으로 나온다. 김현식의 제작자였던 동아기획 김영 사장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음원을 다듬고 반주를 덧입혔다. 스튜디오까지 가지 못한 김현식의 노래들은 모든 기성(旣成)의 것에 염증을 느꼈던 이 사내의 거칠고 황량한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음반으로 발표됐으나 역시 가(假)녹음 버전인 노래 12곡까지 총 21곡이 담긴 음반 '김현식 2013년 10월'<사진>은 21일 발매된다.

◇투병 중 병실·집에서 녹음

유작 가운데 백미(白眉)는 단연 타이틀곡인 '그대 빈들에'다. 시계 초침 소리처럼 연주하는 기타에 맞춰 '이젠 떠나야 할/시간이 되었나봐/이젠 잊어야 할/시간이 되었나봐' 하고 김현식이 노래할 때 그는 죽음을 예견한 듯 마지막 남은 심지를 돋우어 한껏 불꽃을 피워올린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고장 난 장기(臟器) 어딘가에서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올려 비극적으로 터뜨리는 창법을 구사하는 그의 노래는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방치하기보다는 긴장시킨다.

새 노래 '나루터에 비 내리면'은 음질이 너무 안 좋아 안타깝지만, 역시 왜 그 당시에 발표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김현식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노래다. 이 모든 노래는 그가 알코올에 비정상적으로 의존하면서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1988~89년에 녹음된 것들이다. 김영 사장은 "서울 한남동 백제병원과 이촌동 금강병원 병실, 그리고 집에서 녹음된 노래들"이라고 말했다.

이 음반은 일종의 부트레그(bootleg·비공식 녹음)로 라디오에서 틀기 쉽지 않을 만큼 음질이 좋지 않다. 심지어 발걸음 소리나 잡담까지 고스란히 녹음돼 있다. 한 곡당 길이도 대개 2~3분으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발표된 노래와 다른 버전이라는 면에서 죽은 김현식이 즉흥적으로 꾸며 부르는 라이브 같은 느낌도 준다.

◇즉흥 라이브 같은 느낌도

이를테면 '비처럼 음악처럼'이 실린 3집 수록곡 '빗속의 연가'는 발표된 노래와는 매우 다른 구성이다. 두 마디였던 '오늘도 내리는/저 빗속을' 부분은 세 마디로 늘어나 있다. 하이라이트인 '옛사랑/못 잊어/흐느껴 우네'는 '파레미파/파레시/레도시라라'가 아니라 '파레미파/파레미파/레도시라라'로 부르고 있다.

'비 오는 어느 저녁'은 정통 블루스 기타 반주에 맞춰져 있고, 처음 공개되는 노래 '수'도 김현식 음악의 뿌리가 초기 블루스에 닿아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우리가 아는 김현식의 노래들이 정통 블루스에서 편곡 과정을 거쳐 상당히 팝이나 포크 쪽으로 이동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어둠 그 별빛' '사랑했어요' '눈 내리는 겨울밤' '떠나가 버렸네' 같은 히트곡들이 가녹음 버전으로 실려 있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김현식의 가장 큰 공적은 전통적인 트로트 감수성에 기대지 않고 서구 대중음악의 대표적인 장르 대부분을 정면 돌파해 한국 대중음악의 문법으로 완벽하게 녹인 데 있다"고 평했다. 그는 동시대 출현한 전인권과 함께 한국 어디에도 없던 노래를 들려준 보컬리스트였던 것이다.

김영 사장은 "이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은 모두 발표를 전제하고 녹음했던 것이고 더 이상 묵혀둘 수 없었다"고 공개 이유를 밝혔다. 저작권 승계자인 김현식의 독자(獨子) 완제(31)씨와도 협의를 마쳤다고 했다. 그러나 음악계에서는 "허락받을 수 없는 노래들을 제작자가 일방적으로 발표할 수 있나" 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김현식 최대 히트곡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그가 숨지고 난 뒤인 1991년 발표됐었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고 그의 새 노래는 깊은 감동과 긴 여운을 준다. 이 곡들을 발표하는 것이 옳은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