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가을 앞에서

구월이 갔다. 매미 소리 슬그머니 사라진 자리에 귀뚜라미 울어대니 이젠 아무리 여름이라고 우긴들 누가 여름이라고 수긍을 하겠는가. 아침저녁으로 바람은 선들거리고 아무리 서울 공기가 탁하다지만 밤이면 보이지 않던 별들도 하나둘 뚜렷이 뜬다.

여름이 싫었다. 태양의 이글거림도 바람이 불어도 끈적임을 털어내지 못하고 습하디습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밤낮없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는 또 얼마나 지겨웠던가. 그래도 여름에 질소냐 싶게 버티고 지나느라 팔월이 가고 구월마저 떠나는 걸 느끼지 못했다.

구월의 달력을 넘기며 기어이 올 것이 왔다는 걸 안다. 그 누가 아무리 발버둥 친 들 흐르는 세월을 어찌 막겠는가. 내게는 영원히 가을이라는 계절이 없을 줄 알았다. 아니 어쩌면 노화방지 크림이니 무슨 무슨 팩이니 하며 애써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동창 모임에서 누군가 염색하던 머리를 그냥 흰머리 나는 대로 두겠다고 선언하더니 이번 달 모임에서 또 다른 친구가 염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그대로 두겠다는 것은 찾아온 가을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그저 세월 흐르는 대로 당당히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인데도 나는 아직 그런 선언을 하지 못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꽃을 피우지 못하면 나뭇잎으로라도 버티고 있으면 내가 살아온 길을 따라 곱게 물이 들어갈 터이다. 노란색으로 물들어갈지 빨간색으로 물들어갈지 그건 나도 아직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색으로 물들지라도 내가 여자임을 잃고 싶지 않다. 곧 겨울이 다가와 하얀 눈이 내리면 그때 흰머리 그대로 두어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던 가을이라도 손을 벌려 맞으려 한다. 이왕 오는 가을인데 서로 섭섭할 일 만들어서 무얼 하겠는가. 곧 옆집 감나무에 감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볼 것이고 황금빛 들판에 빛나는 햇살도 보게 될 것이고 그리고 마침내 서리가 내리고 하얀 눈이 내리면 포도주잔을 높이 들고 한세상 열심히 산 나를 위해 축배를 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