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고단했던 美협곡 스모그 연구, 우리 땅 환경연구 기틀 됐죠

1988년 미국의 대표적 국립공원인 그랜드캐니언에 스모그 현상이 발생했다. 오염된 도시에 발생하는 스모그가 청정 지역인 국립공원에 발생하자 미국 사회는 크게 동요했다. 이듬해 가을 스모그 문제 해결을 위한 '그랜드캐니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당시 캘리포니아주의 항공·환경 연구소인 '에어로 바이어런먼트(Aero Vironment)'의 수석 연구원이었던 나는 이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았다.

무엇보다 스모그의 원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우리는 그랜드캐니언에서 동북쪽으로 약 300㎞ 떨어진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의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연기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를 입증하려면 협곡 곳곳에 대기 측정 장치를 설치하고 결과를 분석해야 했다.

그랜드캐니언을 보호하기 위한 프로젝트임에도 먼저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해야 했다. 공단은 실험 때문에 국립공원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시험 장비가 관광객에게 조금이라도 혐오 시설이 돼서도 안 됐다. 실험이 끝나면 실험 전으로 복원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나중에 항상 바닥에 비닐을 깔고 장비를 설치했다. 혐오 시설이 되지 않기 위해 설치 장소도 관광객 눈에 띄지 않는 지역을 골라야 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먼저 2인승 헬리콥터를 빌려 3일 동안 전반적 지형 특성을 파악했다. 3개월 동안 자동차를 타고 총길이 2000㎞가 넘는 지역을 탐사하면서 공기 채집 장치를 설치할 곳을 찾았다. 하지만 협곡 안쪽은 비행이 허락되지 않았다. 자동차로도 갈 수 없어 오로지 다리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협곡 탐사가 등산과 다른 것은 먼저 내려가고, 나중에 올라온다는 점이었다. 협곡을 보려면 해발 2300m 지점에서 거꾸로 500m 지점까지 내려가야 했다. 내려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일을 하고 나중에 올라와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급경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더구나 당시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무게가 3㎏이나 되는 무전기를 들고 협곡을 오르내리기란 큰 고역이었다. 그래도 그때 마주친 야생 산양과 노루의 활기찬 모습,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계곡의 고요는 지금도 다시 느껴보고 싶은 즐거움이었다.

마침내 화력발전소의 후처리 공정이 스모그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발표와 동시에 큰 화제가 됐다. 그랜드캐니언을 지키려는 미국인들의 관심 속에 화력발전소의 후처리 공정이 대폭 바뀌고 관련 법이 제정되는 등 큰 성과를 올렸다.

환경 연구에 대한 보람과 흥미를 느끼며 안정된 미국 생활에 젖어 있던 1990년, 나는 한국에서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환경연구소를 만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내게 한국으로 와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처음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원하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 급여가 한국의 3배가 넘는 안정적 직장도 직장이지만, 한국말에 서툰 브라질 교포인 아내와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말 그대로 겉모습만 한국인인 두 아이 때문이었다.

제안을 받은 지 5개월쯤 지난 어느 날. 별생각 없이 그랜드캐니언을 다시 찾았다. 맑고 광활한 그랜드캐니언의 풍경을 보며, 문득 작은 우리 땅에 스모그가 생기면 누가 그 영향을 연구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거친 협곡과 강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그랜드캐니언의 오염을 막는 성과를 이뤘지만, 정작 내 나라 내 땅에서 등한시되는 환경 연구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뒷짐을 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 거친 협곡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얻은 도전과 성취의 기쁨처럼, 열악한 대한민국의 환경 연구에서 무엇인가 이뤄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내는 서울과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는 "한 번 사는데, 살고 싶은 데서 살아보라"며 고국에 대한 나의 애정을 이해했다.

1991년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대기 환경 연구를 막 시작하던 시기였다. 나는 외국에서 쌓은 연구 노하우와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 대기 환경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96년 여천공단 환경오염 대책 마련을 위한 오염 실태 정밀 조사 사업에서 그랜드캐니언 프로젝트 수행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이 사업은 우후죽순 늘어나는 공단의 환경 문제를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천공단 환경 관련 특별법을 만드는 성과도 낳았다. 이후 최초로 인천과 중국 산둥반도를 오가는 페리선을 타고 서해의 대기 오염도를 측정했던 경험, 국내 최초로 터널 오염도를 측정했던 남산 터널 프로젝트 등은 내게 연구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게 했다.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고 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연구지였던 그랜드캐니언처럼 광활한 미국에서 더 큰 성취를 얻는 대신, 작은 영토에 산과 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고국의 자연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온 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랜드캐니언의 협곡을 뛰어다니던 30대 젊음 대신 이제는 성성한 백발이 내게 와 있지만, 이제껏 걸어온 길에 아무런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의 공존에 환경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문길주 원장은…

40년간 유지돼왔던 KIST 학제별 연구조직, 연구테마 위주 '융합형'으로 바꿔

문길주(文吉周·62)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은 국내 최고의 과학기술연구소를 이끄는 과학계의 리더이다.

원장 취임 이후 3년여 만에 지난 40여년간 유지돼왔던 학제별 연구 조직을 연구 테마 위주의 융합형 연구 조직으로 바꿨다. 대표적인 예가 융합형 전문 연구소(뇌과학·의공학·다원물질·녹색도시연구소) 신설이다. 최근에는 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하노이에 KIST를 모델로 한 베트남과학기술연구소(V-KIST)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취임 후 6개월간 매일 연구원들과 식사하며 의견을 들은 일은 연구원에서 큰 화제가 됐다.

문 원장은 서울 출신으로 고교 1학년 때인 1967년 캐나다 주재 공사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유학을 떠났다. 캐나다 오타와 고교와 오타와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자동차 디젤 엔진이 대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1991년 미국의 환경 분야 연구소인 인터폴, 에어로 바이어런먼트에서 일했으며, 1991년 KIST 대기연구실장으로 영입돼 24년 만에 귀국했다. 한국대기환경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최근 국제대기환경보전단체연합회(IUAPPA) 회장에 취임했다.